나는 고전을 영어원서로 읽을 때, 번역서를 거의 보지 않는다.
결코 영어를 잘해서가 아니다. 번역서를 읽으면 그 뜻이 원문보다 더 어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떤 문장을 여러 번 읽고 나서 그 뜻을 잘 생각해 보아도 쉽사리 알 수 없다면 그 글을 읽는 쪽이 아니라 쓴 쪽의 능력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참고로, 나는 내가 쓴 글을 주변인들에게 자주 보여준다. 그들이 어렵다고 하면 내 탓이구나 한다. 그리고 더욱더 글쓰기 공부에 힘을 쏟는다.
사실이 이런데도 글을 썼거나 옮긴 쪽은 읽는 쪽의 수준이 낮다며 비웃기도 한다. 물론, 법률이나 경제 또는 의학처럼 전문용어 자체를 알아야 문장이 이해되는 때는 또 다르다. 이때는 따로 공부를 해야 하거나 다른 설명이 보태져야 한다.
원서를 읽을 때, 우리말로 그대로 다 옮기지 못하더라도 여러 번 되풀이해서 읽다 보면 대강 무슨 말을 하는지 곧바로 느껴 알 수 있다.
우리말로 번역된 철학책을 잘 이해할 수 없는 까닭은 서양철학을 먼저 수입했던 일본의 학자들이 번역한 책을 또다시 우리가 한글로 옮기는 이른바 중역을 했기 때문으로 본다. 또한, 민법을 비롯한 여러 가지 법학도 외국에서 법 개념을 수입하고 번역하였기 때문에 우리에게 낯설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간추리면, 서양어로 된 원본(A)이 영어 또는 일본어로 번역(a) 되고 또 이를 바탕으로 한글로 번역(b) 된 탓이 아닌가 한다.
설사 원본을 곧바로 우리말로 바꾼다 하더라도 그 용어는 이미 일본학자가 만든 철학 용어를 그대로 쓰기 때문에 중역과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가령, 인간 소외나 노동 소외의 본디 가지고 있는 뜻을 내가 아는 대로 풀어보면 아래와 같다.
인간이 필요해서 창조한 신을 오히려 절대자로 숭배하거나, 인간의 주체적 노동으로 생산한 상품-화폐-자본에 도리어 종속되는 것이 인간 또는 노동의 소외 현상이다.
이런 개념이 없이 소외(Alienation)를 사전 그대로 어떤 무리에서 기피하여 따돌리거나 멀리함이나 인간이 자기의 본질을 상실하여 비인간적 상태에 놓이는 일로 풀이를 한다면 선뜻 그 뜻이 뚜렷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어설프게 읽다가는 왕따로 새길 수도 있다. 어쨌거나, 철학이든 법학이든 그 안에 사용되는 문장은 알기 쉽고 그 뜻이 뚜렷이 드러나도록 써야 한다.
영자신문을 읽거나 원서를 읽을 때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원문을 우리말로 완벽하게 바꾸지 못하더라도 얼추 원문이 주는 느낌을 그대로 간직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늘 정답을 찾아내야 하는 우리네 학습 탓으로 애매모호한 뜻은 용납하지 않는 버릇이 온몸에 베여있다. 그러다가 더 이상의 진도가 못 나가니 그만 재미를 잃고 만다. 그래서 번역본이나 해설서를 찾지 않고서는 못 배긴다.
가독성이 떨어지니 결국은 영어 원서 읽기가 재미 없어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