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비서실에서 메신저로 연락이 왔다. 낯선 분이 큰 소리를 지르며 사장님을 만나러 왔다고 한다. 비서가 나보고 도와달라 한다.
화들짝 놀란 나는 비서실로 급히 내려가본다. 때마침 대표이사는 집무실에 있지 아니하고 바깥으로 나가셨단다.
CEO와 어떤 사이인지 또 미리 만나기로 약속한 것인지를 여쭈어 본다. 그냥 고객일 뿐이고 미리 만나기로 하지 않았다고 한다. 무슨 일로 오셨냐고 하니 투자한 펀드에 손실이 나서 회사에서 최고로 높은 사람한테 항의하러 왔다고 한다. 다짜고짜 돈 내놓으라며 소리를 크게 지른다. 한때 고위직 공무원 생활을 해서 관계와 정계에 발이 아주 넓기에 금감원과 언론에 공개하겠다고 한다.
대표는 지금 자리를 비웠다며 잠시 진정시키고 상담실로 모신다.
정중하게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 여쭈어 본다. 지점에서 자산관리자가 투자권유한 금융상품에서 손실이 나 돈을 물어내라고 지점장에게 요구하니 적법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행위라 보상을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본사의 최고 책임자와 면담하러 왔다고 한다.
사실관계는 철저히 조사를 해서 임직원의 위법행위가 있었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여 손해배상책임이 성립하는 사건인지를 조사하겠다고 약속한다.
잠시 틈이 보이길래 어떻게 출입문을 들어오셨는지 물어본다. 대표이사와 아주 친한 사이라고 하며 자연스럽게 행동하니 카드를 발급해 주어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한다. 잠시 급한 볼일이 있어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한다.
민원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응대할 계획을 머릿속에 짜본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지점장이 곧 사장님의 대리인이니 다음부터는 지점에서 상의하시길 바랍니다.
지금부터 그 까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법인은 사람이 아닙니다.
법에 따라 최소한 재산관계에 관해서는 사람과 같은 자격을 가지기 때문에 법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법인은 일을 처리할 대표 기관과 대표를 따로 뽑습니다.
좀 큰 데서는 회사가 해야 할 여러 계약, 곧 ‘금융상품을 만들어 팔거나 사고, 고객을 관리하거나 또 직원을 뽑아야 하는 일 따위’, 을 일일이 대표이사가 혼자서 모두 체결해야 한다면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판입니다.
그래서 회사는 간부급 직원으로 하여금 여러 업무 분야의 일 또는 계약에 대하여는 그의 결정에 쫓아 이를 체결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한 행위로 발생하는 법적인 효과는 회사 자신이 가집니다. 그래서 방대한 조직의 계약 사무는 간편하게 처리될 수 있습니다.
이상과 같이 본인이 그 의사에 기하여 대리인을 선임하고 대리 권한을 주어 대리 행위가 이루어 지므로 이를 임의대리라고도 한답니다.
내친김에 상법 얘기마저 꺼낸다.
상법에 따르면, 회사의 경우 내부관계에서 일정한 절차 요건을 갖추어 유한회사는 이사, 주식회사는 대표이사, 합명•합자회사는 대표사원 등의 대표기관이 지배인을 별도로 선임합니다.
이때 선임한 지배인이 바로 영업주를 대신하여 그 영업에 관한 재판상 또는 재판 외의 모든 행위를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상업 사용인입니다. (상법 제11조 제1항)
또한 표현 지배인이라는 규정에 따라 본점 또는 지점의 본부장, 지점장, 그 밖의 지배인으로 인정될 만한 명칭을 사용하는 분은 본점 또는 지점의 지배인과 동일한 권한이 있는 것으로 합니다. 그래서 금융분쟁조정업무(민원)를 담당하는 부서장은 그 명칭여하를 묻지 아니하고, 해당 업무에 관하여 대표이사의 업무를 대리할 권한이 있으므로 굳이 대표이사를 만나지 않고도 업무처리가 가능합니다.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서는 공직에 근무하셔서 누구보다도 더 조직체계를 알 터이니 다음부터는 관련부서의 장을 꼭 찾아 달라고 당부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표이사가 그들을 얼마나 우습게 보겠는가 하며...
상담 내용을 이와 같이 머릿속에 다 그려 놓은 찰나에 민원인이 자리로 되돌아온다. 아까 생각한 스크립트대로 해보려 한다.
하지만, 자리로 돌아온 민원인이 되려 큰 소리를 친다. 자기가 누군지 아냐며 당장 나보다 높은 사람 나오라 한다. 그러면서 자기는 한때 고위 공직에 몸을 담고 있었으며 얼마 전 까지는 어느 대학교 경영학과 교수였다며 회사의 불법행위를 만천하에 다 알리겠다며 으름장을 놓는다.
하도 막무가내로 나와서 내쪽에서 자세를 낮춘다. 이럴 때 상대방의 직업에 맞춰 교수님이나 박사님 또는 선생님이라 불러드리면 꽤 효과가 크다.
그래서 이번에는 전략적으로 ‘교수님도 잘 아시다시피’를 연발한다. 상법상 법인의 조직체계와 책임자에 대하여 짧게 말한다. 본인이 교수라 모두 다 잘 알고 있다며 계속 말을 끊는다. 너무 화가 나서 그런다고 하길래 교수님의 심정은 잘 알겠으나 적법한 절차에 따라 합리적으로 해결하셔야 하지 않겠냐고 반문한다.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이다.
얼추 두 시간에 걸쳐 상담을 해서 서로 지칠 대로 지친다. 진이 다 빠지도록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교수님도 잘 아시다시피…
어쨌든 잘 처리해 주길 바란다며 다음에 연락하겠다며 내 명함을 챙겨 자리를 떠난다.
며칠이 지나고 나서 그분한테서 전화가 온다. 아직도 처리가 되지 않았냐며 다그치듯이 묻는다. 나는 바로 “교수님도 잘 아시다시피…”로 맞받아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