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문 원본이 수록된 양창수 교수의 민법 시리즈, 곧 민법 I(계약법), 민법 II(권리의 변동과 구제), 민법 III(권리의 보전과 담보)을 두 번을 읽었다.
이 책들은 서울대학교 로스쿨 교재로 쓴다고 한다. 같은 교수의 책 민법입문으로 전체를 정리하고 또다시 읽고 있다. 젊은 사람과 달리 나이도 있고 굳이 변호사 자격을 따야 할 까닭이 없는 나로서는 책의 내용이 혼자 공부하기에 많이 버겁기는 하지만 그래도 교양을 쌓는다는 마음으로 읽고 있다. 판결문을 읽으면 읽을수록 판결의 대상이 된 사건은 마치 한 편의 법정 드라마나 소설을 읽는 듯한 착각이 들게 만든다.
논리적 추리를 다룬 교양서적 가운데 이것들을 뛰어넘는 것들이 또 있을까!
그런데, 자꾸 화가 난다. 공적(公的)인 일로 느끼는 분노에 가깝다. 공분(公憤)은 굳이 다스릴 까닭이 없다고 맹자가 그랬다. 그냥 이렇게 열린 곳에서 나타내면 된다. 옳고 그름은 읽는 사람들의 몫이다.
처음에는 보통 사람들이 잘 읽지 않는 책을 본다는 자부심이 컸다. 그리고 속으로 우쭐댔다. 그런데 날이 가며 앎의 넓이와 깊이가 쌓일수록 이 분야의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우리네 보통 사람들한테 한 짓을 생각하니 무척 화가 난다.
하기야 못 배운 나를 탓해야지 잘난 그들을 뭐라 하면 쓰나. 그래봐야 나만 쪼다지!
영어원서나 법학 책 읽기는 둘 다 시간을 들여서 공부하면 고유의 어법과 문장구조가 눈에 쏙쏙 들어온다. 그리고는 법적인 논리체계가 머릿속에 만들어진다. 그래서 내용도 쑥쑥 이해가 된다. 이상하게도, 영어 원문으로 쓰인 내용은 단번에 알 수 있는데, 법학은 갈수록 태산이다. 풀어 말해, 영어는 우리말로 옮기지 않고도 그 뜻을 그대로 가슴으로 느끼게 되었는데, 법학은 법률용어(한자)를 한글로 한 번 더 되새기고 나서야 이해가 될 듯 말 듯한다. 그러니 이해하는데 시간이 더딜 수밖에…
법학이 한글로 쓰인 것인데 왜 이렇게 된 걸까?
영문 계약서, Private Equity Fund나 Hedge Fund의 Prospectus 그리고 미국 대법원의 Precedent에 견주어 한국의 민법 교과서를 읽으면서 느낀 마음에서 그 답을 찾아본다.
둘 다 똑같은 법률문서인데 앞의 것은 법률용어의 뜻만 정확히 알면 문장 구조가 복잡해서 그렇지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읽다가 보면 나중에는 영어식 문장구조가 매우 논리적•체계적으로 틀이 잡혀 있다고 느낄 수도 있다. 어쩌면 나처럼 반할지도 모른다. 수학 문제를 공식에 대입해 풀듯이 읽는 맛이 아주 좋다.
영어 배우기를 참 잘했다.
그러나, 민법 교과서나 판결문을 보면 한글을 읽고 있는데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기존의 판례를 복사해서 붙이고 또 ‘간주, 추정, 일응, 가사, 입증책임, 최고, 그 후단에서 거시의 증거에 의하여, 그 설시에 있어’ 따위로 한글을 읽으면서도 또 한글로 바꿔서 그 뜻을 새겨야 할 일이 수두룩하다. 문장구조는 당연히 길고 또 비문도 가득 차고도 넘친다. 하루빨리 판사를 비롯한 법조인들도 국문학과 출신이 많아지면 좋겠다.
나만 이런가! 그럼 또 나의 우둔함을 나무라야지. 처음에 정말 그런 줄 알고 법조인이 대단하다며 우러러볼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 까닭을 알고 나서부터는 화만 많이 난다.
법학 책을 그렇게 읽고도 영어와 달리 그 뜻을 쉽사리 알 수 없는 까닭은 법률용어와 일반 용어의 뜻을 완전히 다르게 꾸며놓았기 때문이다.
가령, 민법상 선의 또는 악의라고 할 때에는 보통 우리가 쓰는 뜻과는 다르게 이에는 아무런 도덕적 시인 또는 비난의 뜻이 없다.
쉽게 말해, 단지 어떠한 사실을 알았으면 악의이고, 몰랐으면 선의이다. 그 외에 누구를 해칠 의사가 있거나 악한 행위를 할 생각을 가져야만 악의인 것은 아니다.
이처럼 한자를 한글로 옮겨 놓았음에도 우리가 직관적으로 생각하는 바로 그런 뜻과는 거리가 아주 먼 제3의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영어 공부를 맨 처음 할 때 시작하는 단어 외우기 과정을 준용해서 법률의 고유한 언어로 해석할 줄 알도록 해 놓았다. 이른바 전문가들의 밥그릇 챙기기의 기본 틀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조선시대의 양반들이 한글이 창제되고 보급되었는데도 기득권을 유지하며 잘난 척하려고 애써 모든 의사소통을 중국 글자 말로 바꿔 말하던 버릇에서 비롯된 듯하다. 또 일제강점기를 거쳐 미군정시대 그리고 현대까지 온갖 외래어로 전문용어를 다 바꾸어 놓고 배운 사람들끼리만 그 뜻을 알아먹도록 한 것이다.
법률전문가들끼리의 약속된 언어라 법률 공부를 따로 하지 않고는 이해를 못 하게 만들어 놓았다. 이들을 따라 철학도 경제학도 의학도 모두 보통 사람들이 자기네 영역을 넘겨보지 못하도록 아주 높은 벽을 쳐놓았다.
영어는 언어 자체에서는 아무리 못해도 그런 못된 짓거리를 하지 않는다. 다만 학문 분과별 논리체계는 최소한 알아야 온전한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별도로 배워야 한다.
나는 철학 책도 번역본 대신 영어원서나 영역본만 읽는다. 김수행 교수가 번역한 자본론을 펼쳐 읽다가 기겁해서 펭귄출판사의 영역본을 읽었다. 철학 역시 법학과 마찬가지로 한글을 읽는대도 도무지 무슨 말인 지를 몰라 택한 자구지책이었다. 영역본을 읽고 또 영어로 쓴 주석서를 읽고 나니 그제야 자본론의 본 뜻이 조금씩 눈에 익기 시작했다. 지금은 거의 푹 빠져 평생 읽어 볼 작정이다.
한국학을 뺀 모든 학문분과에서 참된 민주화를 이루려면 모든 학문을 순수한 한글로 바꾸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우리말화가 된 한자나 일본어 그리고 영어 따위는 있는 그대로 써도 좋다. 왜냐면, 다른 말로 옮기는 것보다 그 말들이 의사표시상 명확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학문인 경제학과 법학은 대한민국에서 제공하는 기본 의무교육만 충실히 받더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러나, 쉽게 올 세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그들의 말법을 배우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