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아침 출근길 9호선 급행을 탔다.
비좁은 전철에서 내 앞에 서 있는 여대생이 책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뭔가 중얼거린다. 무얼 하나 궁금해서 눈치를 못 채도록 내 책을 보는 척하고 슬쩍 곁눈질을 했다. 행정학 기본서인데 온갖 색깔의 형광펜으로 글자란 글자에 모두 줄을 쳐 놓았다. 음영이 없는 곳이 매우 중요한 부분이겠지! 이번 역은 노량진역이라는 방송에 따라 젊은이가 내렸다. 아마 공무원 시험 대비 학원으로 가나 보다.
노량진역에서 뒷사람이 잘 내릴 수 있도록 열차를 내리고 다시 탔다. 이번에는 내 또래 같은데 머리가 많이 없어 보인다. 주변머리 없이 그도 부동산 공법을 아까 그 학생처럼 또 달달 외운다. 그 책은 연필로 낙서가 가득한 데다가 여러 색깔의 견출지도 많이도 붙어있다. 여기는 또 어디가 중요한 곳일까? 전체 몇 페이지 안 되는 책을 찢어 다닌다. 남들이 볼까 봐 그랬나 보다. 몇 번을 떨어졌나 보다. 그래도 그 열정 대단하다. 박수를 보낸다.
공인중개사 2차 과목 가운데 하나인 이것은 시험 합격에 아주 큰 노릇을 하는데 문제는 모두 암기사항이다. 법인데 이해고 뭐고 일단 달달 외워야 한다. 그래야 붙는다.
그러나, 두 과목 모두 시험이 끝나면 머릿속에 하나도 남는 게 없다. 내가 이런저런 시험에서 그랬다.
어릴 때 우리 동네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옆집 형이 있었다. 공부를 썩 잘했다.
어느 날 내 앞을 가던 그 형이 영어 사전을 찢는다. 그러고는 팍팍 꾸기고는 어딘가에 넣는다.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영어 단어 공부법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삶아 먹거나 씹어 먹을 생각인가 보다. 당시 사전의 단어를 모두 달달 외운 사람들이 저렇게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도 따라 해 보려 하다가 단어를 다 못 외워 포기했다. 돌이켜보니 그만두길 잘했다.
대학교에 들어갔더니 너도 나도 Vocabulary 22,000이나 33,000을 들고 다니며 외우고 있었다. 서로 단어를 물어가며 상대방이 모르고 내만 아는 단어면 으스대기도 했다. 물론 나도 그들을 따라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되돌아보니 영어 단어나 법률 용어는 저렇게 단순 주입식 암기로 해서는 금방 까먹어서 어데 가서 써먹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But we have to make sure we stick to the plan and we don't veer around like a shopping trolley.
2023년 8월 4일 자 아침 Financial Times headline에 나온 내용이다. 영국의 BOE가 기준금리를 올리고 나서 은행 총재가 언론과 인터뷰한 내용이다. 본문에 나오는 단어(Veer)는 방향을 홱 틀다 또는 방향을 바꾸다는 뜻이다. 그런데 설명처럼 쇼핑카트를 끌고 다닐 때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을 연상하니 바로 뇌리에 박힌다.
그리고 이것처럼 미국 연준(Fed)의 통화정책 메커니즘(The Mechanism of Monetary Policy)을 이해하고 또 장단기 금리 역전현상(Yield Curve Inversion)의 뜻을 이해하니 영어 단어를 달달 외우려고 애쓰지 않아도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는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2020년 1·6 미 의사당 폭동 사태와 관련하여 워싱턴 DC 연방 지방법원에 출석해 기소인부절차를 밟고 있다. 이는 연방검찰이 대선 결과를 뒤집기 위한 사기 모의 선거인단 표결 인준 등 공무집행 방해 모의 투표권 침해 공식 절차 방해 등 4개 혐의로 트럼프 전 대통령을 기소한 데 따른 것이다.
여기서 나온 트럼프 대통령의 기소사실인부절차(起訴事實認否節次)가 영어로 바꾸면 Arraignment이다. 이는 공판정에서 피고인에 대하여 기소 사실에 관하여 유죄 또는 무죄의 답변을 구하는 절차다.
이러한 내용을 대강이라도 알게 되면 단어 공부는 자연스럽게 된다.
또 민법에서 주택을 담보로 대출을 받으면 근저당권을 알 수 있고 임대차계약을 체결하면 보증금이니 확정일자니를 알고 또 살다 보면 불법행위니 채무불이행이니 부당이득반환이니 물권적 청구권이니 하는 법률용어는 억지로 외우려 하지 않아도 된다. 살다 그런 일을 겪게 되면 그냥 쉽게 알게 된다.
삶의 경험이 쌓일수록 영어 단어뿐만 아니라 일반 어휘 그리고 법률용어는 몸소 체험하며 알게 되는 수가 많다. 공부는 바로 이런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 영어나 법학 그리고 철학을 공부하면 이해도가 높아져 젊었을 때보다 훨씬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머리가 잘 안 돌아가고 눈이 안 보인다는 핑계로 공부를 멀리한다.
모르고 하는 소리다. 내가 보기엔 모두 다 자기 합리화일 뿐이다.
물론, 뒤늦게 독서를 시작하려 해도 집중력이 떨어져 오랫동안 자리에 앉아 있기 힘들다. 그런데 이것은 나이에 따른 그런 장애가 아니라 전 세대 모두가 그렇다. 좋은 버릇은 들이기가 어렵다. 그러나, 처음엔 억지로 하고 되풀이하다 보면 어느새 자리가 잡힌다.
공부를 하는 데는 그 어떤 핑계도 통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