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맘•얼 공부 (2)
웬만해서 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에 화내지 않는다.
한때 대나무 쪽과 견줄 정도로 올곧던 나다. 그랬던 내가 변해간다. 나이 탓인지 오랜 시간의 독서와 운동으로 마음을 단련시킨 덕택인지는 알 길이 없다.
이번 일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객님, 중간에 말 끊지 마시고 제가 좀 더 설명드릴 테니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자기주장만 늘어놓는 불만고객을 응대할 때 내가 자주 쓰는 말이다. 일종의 기선제압용이다. 때에 맞춰 잘 쓰면 매우 효과적이다.
대신 최대한 짧은 시간에 간결하고 논리 정연하게 설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되레 역공을 맞는다. 법률이론과 실무지식을 총집결해 가장 정제된 언어로 의사를 표시해야 한다.
고도의 노하우가 필요하다.
이 짧은 순간을 위해 늘 법학 교과서와 철학책 그리고 신문의 사설을 끼고 산다. 일종의 PRI(Preliminary Rifle Instruction) 곧 사격술 예비훈련이다.
초보때는 별도의 스크립트를 작성해서 글로 써놓고 Simulation도 해봤다. 이제는 몸에 배어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도 꽤나 논리적이고 유식한 사람으로 통한다. 웬만한 사람들은 그 내용여하를 막론하고 나와 직접 논쟁하려 들지 않는다. 나도 역시 그들과 말보다는 글로 의사를 전달하는 게 좋다.
이 업무를 하면서 배운 최고의 성과는 논리적 설득과 감성적 공감능력의 터득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나도 똑같이 당했다.
0000 콜센터 직원과 통화를 하는데 나한테 “고객님, 제가 좀 더 설명드릴 테니 잠시만 더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하는 게 아닌가!
아뿔싸! 순간 적잖이 당황했다. 혹시 지금 나도 저 직원에겐 문제행동 소비자들로 비칠 거라 생각했기때문이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어 드릴 테니 말씀해 보십시오. “라고 했다. 오히려 상대방이 더 놀라는 게 느껴진다. 나 혼자만 아는 얘기지만, 나는 남의 말을 잘 듣는데 특화된 사람이다. 오랜 시간 축적된 실무경험 때문이다. 중간에 남의 말을 끊었을 때, 돌아오는 대가가 거의 치명적이다.
안쓰럽지만, 저 직원이 나한테 잘못 걸려든 것 같다.
흥분한 상담원이 다짜고짜 설명한다.
그는 내가 주문한 원서는 이미 출시되어 0000의 온라인사이트에 올라가 있다. 그러나 회사의 서재시스템(역량개발 목적의 도서구매 지원서비스)에서는 회사가 비업무용 목적의 용도로 제한하여 구매가 불가하다는 것이다.
직원의 설명은 짧게 끝났다.
이제 내 차례다!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고 속도는 느리게 그리고 정중하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경북 북부지역의 억센 말투로 나의 논변이 반감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고쳐보려 해 봤는데 차라리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게 더 낫다.
나는 그 직원에게, ”내가 처음에 한 얘기를 듣지 않은 것 같다. 나는 분명히 ‘0000에서 우리 회사에 제공하는 도서 구매서비스는 두 가지다. 하나는, 역량개발비로 지원하는 회사의 서재시스템이다. 다른 하나는, 개인에게 복지포인트를 지급하여 0000가 판매하는 모든 책을 살 수 있는 기업복지 제도다. 전자는 회사에서 업무용을 제외하고는 구입대상 도서를 제한한다. 반면, 후자는 온라인 0000에서 구입이 가능한 전품목은 주문이 가능한 것으로 안다.
나의 질문은, 오늘 출시된 책이 0000앱에는 버젓이 구입할 수 있는데 복지포인트앱에서는 주문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그 책을 구입할 수 있도록 복지포인트앱에 업로드를 시켜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직원분께서는 복지포인트 제도는 듣지 않고 회사의 서재 시스템만 언급하지 않았는가? “라고 요목 조목 따졌다.
물론, 흥분하지 않고 매우 차분하게 말이다.
내 말을 다 듣고 난 그 직원이 사과한다. 빨리 꼬리를 내려주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눈치가 빠르고 요령이 있어 보인다. 나도 한때는 저 직원처럼 고객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지 않아 낭패를 본 적이 있다. 그래서 충분히 이해가 되어 그냥 속으로 분을 삭인다. 어른이 되어가나 보다.
어쨌든 내가 고객에게 자주 써먹던 멘트를 도리어 내가 들으니 새삼스럽다. 진상 고객 취급을 받을 뻔했다니 기분이 썩 좋지 않다. 이제야 나한테 저런 말을 들었던 고객님들의 마음을 조금 헤아릴 것 같다.
그래서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하는 것인가 보다. 앞으로 더욱더 진중해야겠다.
2023년 2월 7일 퇴근 무렵 0000에서 메시지가 왔다.
[0000] 안녕하세요 고객님
이전 문의하신 부분으로 담당자 확인 중에 있으나, 처리 시까지 시간소요되고 있어, 고객님의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 빠른 처리를 도와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직원의 잘못된 응대에 화내지 않고 차분하게 대응한 내가 너무 대견하다. 또 다른 나인 Impartial Spectator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독서와 10km를 날마다 하는 이유인, 자기 절제를 바탕으로 논리적 설득과 감성적 공감을 터득, 때문에 남들 다 겪는다는 권태기 한번 거치지 않았다.
앞으로도 흔들림 없이 그러하리라 다짐한다.
(후 기) 2023년 2월 17일이 되어도 2월 7일 주문하여 말썽이 많았던 문제의 그 원서가 여전히 해외발주로 떠 있길래 0000 홈페이지에 현재상태를 알려 달라는 글을 남겼다.
2월 20일에 현재 해외 발주 상태라 기다려 달라는 답변을 받았다. 그랴서 또 희망을 갖고 기다렸다.
2월 28일 참다못해 0000로 전화를 했더니 현지에서 품절상태라 구매가 불가하다는 것이다. 그럴 거면 1주일 전에 책이 너무 소식이 없어서 온라인으로 글을 남길 때나 좀 알려주지.
또 화가 나지만 참는다.
진짜 성숙해가나 보다.
2월 28일, 책의 구매를 취소하고 다른 @@@@로 연락해 본다. 거기서는 현지거래처의 우수한 역량으로 그 책을 구입할 수 있으리라 믿어본다.
3월 2일, 오늘 @@@@에서 연락이 왔다.
[Web발신]
[@@@@] 안녕하세요. @@@@입니다. 문의하신 직수입양서 A Companion to Marx's Grundrisse 해외거래처 확인 시 현재 소량 재고 있다고 합니다. 단, 주문 시점에 따라 변동 있을 수 있는 점 참고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또 보름정도 기다려야 한다. 까짓 거 기다리지 뭐. 0000에서 진작 알려주었으면 @@@@로 주문했을 텐데.
아 문제의 그 책, 진심으로 사서 꼭 읽어 보고 싶다!
조선 후기 실학자 혜강 최한기 선생이 청나라에 신간 서책을 구입하려 할 때, 바로 이런 심정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