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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가 흙과 땅을 적시듯이

by 들풀생각

우리나라 대표 대하소설인 박경리 선생의 토지완독에 세 번째 도전했다.


아서라, 또 실패다!


처음 도전할 때는 그래도 1부 3권까지는 읽었다. 그 다음번에는 그나마 2권에서 멈췄다. 그러나 이번엔 1권 서문만 읽고 또 돌아섰다.

도전 사이에 걸린 시간을 헤아려보지 않았다. 구태여 셈한다면, 모두 더해 5년은 넘는다.




토지를 끝까지 다 읽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것은 어느 유명인이 쓴 글쓰기에 관한 책을 읽고 나서다. 그의 뜻에 따르면, ‘글을 잘 쓰려면 박경리 선생의 토지 1부 4권을 10번 이상 읽어야 한다’고 했던 듯하다. 인터넷 중고 서점에서 1부만 사기는 좀 없어 보여서 2부까지 총 8권을 싸게 사들였다.


나는 주로 정치나 경제 같은 사회과학도서나 철학책을 원서로 읽는다. 그리고 남는 시간에는 민법과 헌법 그리고 행정법 따위의 법학교과서를 본다. 논리 정연한 문체 덕택에 전문용어 하나하나가 눈에 쏙 들어와 읽기가 너무 편하다. 그리고, 한글로 쓰인 책은 고전이나 학술서같이 해당 분야 최고 권위자 또는 학자(대학교수)가 쓴 교양도서를 많이 읽는다.


소설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과 같은 고전을 원문으로, 백정과 같은 하층민이 주인공인 홍명희 선생의 임꺽정을 3번이나 읽었다. 둘 다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드라마 시리즈도 몇 번 봤다. 그리고, 권정생 선생의 한티재 하늘과 춘원 이광수의 원효대사도 읽었다.


거의 기적에 가깝다.


분명히 소설을 좋아하는 듯한데, 딱 거기까지다. 독서 편향을 없애보려고 책 좀 읽는다는 사람들이 모두 읽은 토지에 도전해 보기로 했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새로운 도전이라 재미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소설 특유의 문체가 나와 코드가 맞지 않았다. 글쓰기 초보가 작가의 수준 높은 스타일을 따라 하다가는 죽도 밥도 되지 않을 듯했다. 그런 목적으로 읽지 말고 스토리에 집중하라는 주변 지인들의 조언을 멀리하고 분석적으로 따지면서 접근하였다.


당연히 실패다.




원인을 분석하고 나서 제대로 소설을 읽어 보려고 Thomas C. FosterHow to Read Literature Like a Professor를 원서로 읽었다.



출판사의 설명에 따르면,


이 책은,

미국 대학생들에게 교과서처럼 읽히는 영미문학 감상의 길라잡이로 영미문학에서 상징적으로 쓰이는 원형, 상징, 코드와 페턴 등 거의 모든 것의 숨은 의미를 알려준 것이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문학전공자의 독서 방식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어 일반독자에게는 여러 장르의 작품을 좀 더 깊고 포괄적으로 즐기게 하고 문학도에게는 더 세련되고 다중적인 비평 안목을 갖추는 중요한 계기를 선사하는 책이라 소개한다.


어쨌든, 최신형 무기를 장착하고 다시 결의를 다지며 전장을 나섰다. 하지만, 전략과 전술 모두에서 실패하며 완독은커녕 처음 읽은 수준도 못 나갔다.


블로그를 운영하고 또 브런치 작가가 되면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도전해 보기로 했다.


그러면 그렇지, 역시 나는 나야!




이번에는 아예 서문만 읽고 완전히 무릎을 꿇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우연히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라는 곳에서 정의론의 대가인 마이클 샌들이 인터뷰한 내용을 보고 나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어려서부터 역사와 전기 같은 비소설 장르의 책을 좋아했어요. 아주 어릴 적에는 야구팬이어서, 야구 영웅 전기만을 골라서 읽곤 했죠.

지금도 주로 비소설 장르의 책을 읽는 편이고, 그중 대부분은 철학과 정치 철학 관련된 책들이에요. 왜냐하면 제가 글을 쓰고 가르치는 분야이기 때문이죠. 이런 저를 보고, 소설을 주로 읽는 제 아내는 제가 소설을 읽지 않는다고 놀리기도 해요.

저의 유일한 독서습관은, 질문을 하며 책을 읽는 것이에요. 특히 철학에 관한 책을 읽을 때면 철학자의 주장에 대해 생각을 해보고 저자에게 질문을 합니다. 이러한 저의 독서 습관은 강의 스타일에도 연결되는데.

저는 항상 학생들에게 정치철학 관련 도서를 볼 때 능동적으로 읽으라고 권해요. 단순히 철학자의 주장을 기억하기 위해 책을 보는 것이 아니라.

2천 년 전의 철학자일지라도 그가 우리 곁에 살아 있다고 가정을 하고 질문을 하며 읽으라고 하죠. 책은 작가와의 대화로 초대하는 일종의 초대장이에요.


이 글을 읽고 나서 느낀 나의 가장 큰 문제는 책을 읽는 방법도 그렇지만 원인은 더 큰 곳에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시나 소설이나 수필과 같은 문학작품을 보고 싶은 마음도,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날마다 Financial Times와 The Economist 그리고 법학교과서만 읽어 나가기에도 나에겐 시간이 버겁다. 그리고 이것들을 읽으면 진짜로 재미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더군다나, 2022년 1월부터는 The Economist에 흠뻑 빠져들어 처음부터 끝까지 말 그대로 ‘From Cover To Cover’하고 있다. 주말에는 운동과 가사를 돌본 후 이것을 읽는다. 그러다 보니 진이 빠져 다른 책을 읽을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마음의 여유를 갖고 짬을 내어 찬찬히 읽어야 하는 그날이 올 때 다시 도전해 보련다.




그나저나 간결하고 부드러운 글을 써 모두가 읽기 쉽도록 하겠다는 다짐을 또 저버려야 할라나. 기회비용으로 생각하고, 직설적이고 분명한 어조의 논리적인 글을 쓰자. 그리고, 정확한 정보전달을 목표로 해서 나의 글을 특화시켜야겠다. 솔직히 문학적 감수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나도 알고 독자들도 모두 잘 안다.


그냥 세상에 없던 나만의 문체를 아예 새로 만들어야겠다.


지금껏 읽어가고 있는 책에다가 곽윤직, 양창수, 김준호 교수의 민법교과서에 이어 지난번 주문한 홍정선 교수의 행정법 그리고 성낙인 교수의 현법교과서를 보태 더욱더 치밀하고 밀도 높은 글이나 써보자.




한동안 고민하다가 또 다짐한다.


나도 한번 간결하고 논리적인 그리고 우아한 그런 멋진 글을 써보고 싶다.


그래서 이번에는 전략을 완전히 바꿨다. The Economist와 Capital을 정해진 분량만큼 읽고 짬이 나면 토지(土地)를 읽기로. 마치 가랑비가 흙과 땅을 적시듯이…


이제 또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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