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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연 Jan 04. 2022

한낮 기온은 영상 1도



  한낮 기온은 영상 1도였고, 맑은 날이었다. 공기는 차가웠고 바람이 부는 곳은 추웠지만, 버스 창가에 비치는 햇살은 따뜻했다. 가지만 있는 가로수가 이어지다가 갈색으로 마른 잎을 잔뜩 달고 있는 핀오크가 줄지어 있는 길이 나타났다. 푸르스름한 하늘엔 붓으로 쓱쓱 칠해놓은 듯한 흰 구름이 군데군데 있었다.      


  여러모로 취향이 비슷한 R을 만났다. R은 평소처럼 내 얘기를 잘 들어주었고, 중간중간 “그때 너는 어땠는데?” 하고 느낌을 묻곤 했다. 나는 그런 상황에서 내 기분은 어땠는지 기억을 더듬어가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다가 풀썩 오래전 시어머니와 살았던 이야기가 쏟아졌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그때 시어머니의 행동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쉽게 감정이 헝클어졌다.

  “아, 이런. 나도 모르게 안 좋은 얘기를 길게 해버렸네.”

  정제되지 못한 감정을 날 것 그대로 주르륵 흘려버린 게 미안했다. 새해 첫 만남답게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걸 화제로 삼아야 했는데, 왜 그런 쪽으로 말이 흘러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괜찮아. 그런 생각이 올라오면 풀어놓고 뜨거운 김을 빼야 해.”

  R이 담담하게 말했다.      


  카톡이 왔다. 남쪽 지방으로 여행 간 친구들이 사진을 보냈다. 그중 눈에 띈 건 뒷모습을 찍은 사진이었다. 약속이나 한 듯 모두 밝은 색 패딩 점퍼를 입었고 똑같이 왼손을 들고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고 있었다. 그 앞으로 짙푸른 바다가 펼쳐졌고 위로는 투명한 하늘이 이어졌다.      

  -밝은 색 옷 입으니까 예쁘다.

  사진 속 친구들은 아이보리색이나 아주 옅어서 흰색에 가까운 겉옷을 입고 있었다.

  -뒷모습이라 그래.

  -우리도 지금 같이 있어.

  R과 나는 둘 다 어두운 색 코트를 빈 의자에 걸쳐놓고 있었다.

  -더 시시한 것에 목매며 힘차게 살자. 새해 복 많이 받아.

  -각자 자신에게 잘 하자.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아.

  우리는 한동안 각자의 휴대폰을 보며 단톡방에서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어느새 복을 빌어주면 그 복이 다가오는 것을 조금은 느끼는 나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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