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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바리스 에테리아

신인류 프로젝트

by 안이서

실험실에는 최소한의 빛만 흘렀다. 아갸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벽면을 따라 줄지어 선 배양 챔버들이 미세한 푸른빛을 내뿜었다.

그 빛은 맥박처럼 일정한 리듬으로 깜빡였고, 그 안에서는 인간의 손으로 창조된 미완의 생명들이 조용히 자라고 있었다.

아갸는 투명한 격리 캡슐 안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신체는 이미 자연의 생리 주기를 초월한 상태였다.

난소 조직 깊숙이 이식된 ‘광유도 자극 시스템’이 분자 단위로 세포를 깨워, 수면 중에도 난모세포가 자라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캡슐 옆에는 세라이아가 상체를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잠시 실험실에 들른 도리안은 유리벽 너머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갸는 평온해 보였지만, 세라이아의 얼굴에는 피로와 근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주름이 깊게 새겨진 미간에는 오랜 시간의 긴장이 매달려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가정의학과 의사’의 직함을 가졌지만, 지구에서는 항노화 전문가였다.

늙지 않는 나다니엘의 몸을 만든 이는 그의 스승이었고, 젊음을 유지시킨 것은 도리안 자신이었다.

그의 인생 계획 어디에도 ‘하이브리드 인간의 창조’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유인원을 품에 안고 잠든 세라이아를 바라보며 그는 생각했다.

‘내가 신 노릇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지. 유인원과 인간이 저렇게 조화로울 줄도.’

도리안은 세라이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에덴스 아크의 모든 여자들이 한 번쯤 마음을 주었을 그 남자는, 단 한 번도 그 누구의 마음을 받지 않았다. 때문에 도리안은 세라이아가 감정이 결여된 존재라 생각했었다.

‘유인원이라니…….’

아갸를 향한 그의 시선은 누구보다 따뜻했다.


모니터에는 아갸의 세포 분화 속도가 그래프로 나타나 있었다.

한 주기마다 20~30개의 성숙 난자가 안정적으로 생산되었고, 1년 동안 회수된 난자는 총 200개.

그중 절반이 ‘결합 가능’ 판정을 받았다.


도리안은 먼저, 아갸의 유전형 안에서 인간과 유인원의 경계 영역을 분리해야 했다.

그 구역이 정확히 정렬되지 않으면 수정란은 자라지 못하고 붕괴된다.

“빛과 진동의 주파수가 맞지 않으면 생명은 깨어나지 못합니다.”

세라이아의 말에 도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세라이아가 그저 연구 조수로 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리안은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정자를 가장 먼저 제공한 사람도 세라이아였다. 제대로 진행이 된다면 이 땅에 처음 등장할 하이브리드 인간은 세라이아와 아갸의 유전자를 갖은 존재일 것이다.

잘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갸를 닮아 인내심이 깊고, 세라이아를 닮아 선하고 아름다운 존재가 이 땅의 첫 번째 하이브리드 인간이고, 문명의 시작이 된다면 더 없이 좋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도리안은, 옆에 스르륵 나타난 강률 때문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제는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익숙해졌다고는 하지만,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 건 여전했다.

강률은 아무 말 없이 유리벽 안의 아갸와 세라이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오랜 시간 자신을 괴롭혀 온 질문이 비치는 듯했다.

만약 아갸가 나다니엘의 환생이라면, 그 옆에 항상 붙어 있는 세라이아는 도대체 무엇인가.

한참을 침묵하던 강률은 도리안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눈빛만으로 ‘할 이야기가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는, 스르르 사라졌다.

도리안은 곧장 뒤따라 나갔다.

연구실 옆 진료실.

강률은 창가에 서서 어둑한 빛을 등에 받으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도리안은 조용히 문을 닫고 의자에 앉았다.

잠시 후, 강률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나도 후손을 남기고 싶습니다.”

도리안은 눈을 깜빡이며 강률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에너지체잖아요. 어떻게……?”

놀람을 억누르듯 미간에 힘을 주며, 그는 덧붙였다.

“보통 남자처럼… 정자가 있는 겁니까?”

그 말에 강률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금세 기침 한 번으로 마음을 다잡고, 자신의 뜻을 설명했다.

“인류는 문명뿐 아니라 신성도 추구해야 합니다.

제 유전자 안에는 신성을 탐구하고자 하는 정보가 담겨 있죠.

제 후손이 인간들의 영성 발전에 도움이 될 거라 믿습니다.”

그 말에 도리안은 정신이 번쩍 들며 감동까지 느꼈다.

‘역시 강률님은 다르구나.’

자신은 단지 새로운 육체만을 상상했는데, 강률은 영혼의 진화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흠, 흠! 한 가지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강률님.”

그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걸… 채취하려면 약간, 음… 인간적인 절차가 필요합니다.”

강률이 고개를 갸웃하자 도리안은 용기를 내 말했다.

“야한 영상을 보면서 손을 빠르게 움직여야 합니다. 괜찮겠습니까?”

설명을 하는 도리안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 말을 듣자 강률도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지 몰라 허공을 헤맸다.

도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실험실에서 주사기로 쭉 뽑아내면 된다고 생각하신 건 아니죠? 하하하!”

강률도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했었나 봅니다. 아니, 사실은 아무 생각도 없었어요. 그저 제 유전자를 남겨야겠다는 마음뿐이었죠.”

도리안은 장난기와 진지함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표정으로 확고하게 말했다.

“유일한! 방법입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강률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엘라라가… 제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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