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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바리스 에테리아

착상

by 안이서

강률은 자신에게 유일하게 마음을 열어 보인 엘라라의 소망을 이루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이 외롭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후손과 함께 하는 것 밖에 없을 것 같기도 했다.



착상


에덴스 아크의 여성들은 모두 폐경기를 지난 지 오래였다.

자궁 내막은 마른 흙처럼 얇고 차가웠다.

체외 수정란을 안착시키기 위해선, 그 땅에 다시 생명의 수분을 불어넣어야 했다.

간호사 린다는 자청해서 실험체가 되었다.

신이 정말로 인간을 버린 것이 아니라면, 그 가능성은 자신에게서 증명될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의 농도를 조절하자, 놀랍게도 내막은 다시 두꺼워지고 부드러워졌다.

그 변화는 과학의 기적이자, 어쩌면 신의 잔잔한 개입이었다.

도리안은 린다의 자궁에 카테터를 천천히 삽입했다.

영양액 속에서 투명하게 떠 있던 배아 하나가 조심스럽게 주입되었다.

작업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장갑 안쪽은 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손끝의 떨림을 감추려 할수록, 뒷골이 서늘하게 굳었다.

주입은 무사히 끝났다.

하지만 그다음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었다. 착상은 신의 영역이었다.

“잘 돼야 할 텐데.”

도리안의 낮은 중얼거림이 실험실의 공기 속에 섞였다.

린다는 자신의 아랫배를 두 손으로 감쌌다.

가슴에서 시큼한 감정이 밀려왔다.

눈물이 흘렀다.

“이런 기분일 줄 몰랐어.”

도리안은 잠시 당황해 휴지를 찾으며 물었다.

“무슨 말이야?”

린다는 훌쩍이며 웃었다.

“내 안에 생명이 자란다는 거. 내가…… 엄마가 된다는 거.”

도리안은 휴지를 내밀며 혀를 찼다.

“눈물 흘리기엔 아직 일러. 이삼일은 지켜봐야 돼. 착상이 됐더라도 심장이 뛰기 전까진—”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린다가 손을 내저었다.

“그만. 나도 알아. 그래도 이 아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할 거야.”

“린다, 이젠 우리 손을 떠났어.”

“그것도 알아.” 그녀는 눈을 감았다.

“난 기도할 거야. 강률님이 말씀하셨잖아. 내 안에 전지전능한 신이 있다고.

난 그 신에게 하루 종일 기도할 거야. 내 아이가 무사히 자라게 해 달라고.”

도리안은 린다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마침내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렇군. 그런데, 이건 확실히 하자. 그 아이는 네 아이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아이야.”

“그럼 당신도 기도해. 우리 모두의 아이를 위해서.”

도리안의 고개가 한쪽으로 살짝 기울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신에게 기도라니.

1분 전까지만 해도 해 본 적 없고, 할 생각도 없었는데

지금은 기도할 이유가 생겼다.

왜냐하면 그 역시 이 계획이 성공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나는 내 안의 신에게 기도해야 돼, 네 안의 신에게 기도해야 돼?”

그의 말은 농담처럼 들렸지만, 눈빛엔 진심이 스쳤다.

그때 수술실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시술은 잘 돼가고 있나요? 확인하고 싶어서 왔어요.”

엘라라였다. 그녀 옆에는 레이지가 서 있었다.

도리안이 문을 열자 엘라라는 곧장 린다 곁으로 다가갔다.

레이지는 한 발 떨어진 곳에서 시덥잖은 표정으로 주변을 훑었다.

“아프거나 하진 않아요?” 엘라라가 묻자, 린다는 웃으며 대답했다.

“너무 일찍 오셨어요. 착상이 잘 됐는지 확인하려면 이삼일 걸려요.”

레이지는 초음파 화면 앞으로 다가갔다.

어둠 속에서 느리게 배회하는 수정란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아, 난 이 계획이 영 마음에 안 들어요.

만약 뱃속에서 자라는 게 괴물이면 어쩌죠? 그 영화 있잖아요.

외계인이 숙주 배를 찢고 나오는 영화, 에이리언!”

엘라라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고, 린다와 도리안은 어색하게 웃었다.

“놀랍게도 아갸의 유전자가 인간과 그렇게 다르지는 않더군요.”

도리안이 차분히 말했다.

“물론 낙관만 할 수는 없습니다. 실험이 예상보다 길어질 수도 있죠.”

린다의 얼굴이 잠시 어두워졌다.

그녀 역시 두려움이 없지는 않았다.

‘만약 뱃속에서 자라는 생명체가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는 형태라면…’

그 생각이 수도 없이 스쳤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 일을 선택했다.

에덴스 아크에서 생명체를 다룰 수 있는 지식과 기술이 있는 사람은

자신과 도리안, 그리고 세라이아뿐이었고,

그중 자궁을 가진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린다는 인류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책임감 하나로 이 실험에 몸을 내맡긴 것이었다.

“난 긍정적으로 봐요.”

엘라라가 레이지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생명체는 종마다 나름의 에너지 결을 지니고 있잖아요.

아갸는 따뜻하고, 호기심 많고, 인내심도 강해요.

우리 인간과 결이 닮았죠. 세라이아는 말할 것도 없고.

두 에너지가 결합하는데, 상상도 못할 괴물이 생겨날 리 없어요.”

그녀는 린다를 향해 미소 지었다.

“어쩌면 우리가 상상조차 못한 방식으로, 아름다운 생명이 태어날지도 모르죠.”

린다는 그 미소에 이끌려 잠시 눈을 감았다.

두려움이 조금 가셨다.

레이지는 여전히 굳은 표정이었다.

그는 한때 아들을 두었다. 이름은 야미.

그러나 ‘아버지’라는 단어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야미는 거칠고 제멋대로였다. 아버지에 대한 경외도, 존경도 없었다.

레이지는 그 모든 탓을 전처에게 돌렸다.

그녀는 노바리스 에테리아에 도착하자마자 다른 남자와 살림을 차렸다.

새 생명, 육아 — 그런 건 레이지에게 하찮은 일이었다.

그의 관심은 오직 하나, 영생, 신적인 존재가 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우주의 수호자’ 일행이 될 수 없었다.

그의 근본 에너지가 맑지 못하다는 이유로, 강률에게 거부당했다.

그 수치와 분노는 지금도 식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서는 점잖고 묵직한 표정을 지었지만,

혼자 있을 때마다 그 감정이 솟구쳤다.

레이지는 엘라라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보내며 도리안에게 말했다.

“이 뱃속에 있는 것이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없애세요.

우리 인간들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그리고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나가버렸다.

그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질수록,

실험실 안의 공기가 서서히 식어갔다.


도리안과 엘라라는 린다가 쉴 수 있도록 입원실로 옮기고 다시 실험실로 돌아왔다.

엘라라가 도리안을 따라왔다는 건, 무언가 중요한 얘기가 있다는 뜻이었다.

도리안이 문을 닫고 고개를 들자, 엘라라는 곧바로 말을 꺼냈다.

“강률이 정자를 제공했나요?”

도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지원자들의 정자는 그의 바로 앞 냉동고 속에서 고요히 쉬고 있었다.

강률은 보름 전쯤 ‘도움을 주겠다’고 말한 뒤, 그 후로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엘라라는 실험실 안을 천천히 훑었다.

“정자를… 어디에 받아야 하죠? 비커 같은 데에 받아서 오면 돼요?”

그 질문에 도리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 역시 강률이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순결을 지켜야 한다거나, 욕망을 억눌러야 한다는 규율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에덴스 아크의 사람들은 각자의 자유를 존중했고, 강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도 강률에게 의무를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자신에게조차 완전함을 요구하는 사람이었다. 욕망의 흔적조차 타락으로 여기는 듯했다.

도리안은 문득 생각했다. 강률에게 그 행위는, 사람들 앞 광장에서 벗은 몸으로 서 있는 것만큼이나 부끄러운 일일지도 모른다고.

“방법이 있으세요?”

도리안이 묻자, 엘라라는 살짝 미소 지었다.

“글쎄요. 윽박이라도 질러볼까?”

도리안은 멸균 통을 꺼내 조심스레 보냉백에 넣으며 말했다.

“남자는 윽박지르면 더 못 싸요. 부드럽게, 살살.”

그 말에 엘라라는 장난스럽게 째려보았다.

“의학적으로 근거 있는 조언입니다.”

도리안이 눈을 깜빡이며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엘라라는 피식웃고 고개를 흔들며 통을 받아 들었다.

“알겠어요. 부드럽게, 살살.”

그녀가 실험실 문을 나서려는 순간, 도리안이 뒤에서 외쳤다.

“받으면 바로 뚜껑 닫고, 햇빛 안 보이게 보냉백에 넣어서 삼십 분 안에 가져오세요!”

엘라라는 돌아보지 않고 손을 들어 흔들었다. 그 손짓엔 묘한 여유와 웃음이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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