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지
레이지
아버지 나다니엘은 190센티미터가 넘는 거구였지만, 장남인 레이지의 체격은 그에 비하면 초라했다. 키는 174센티미터. 하지만 프로필에는 178센티미터라고 적혀 있다. 그 네 센티미터가 그의 자존심을 지탱해 주었다.
아버지는 재력은 물론 외모까지 출중했다. 대중은 그를 ‘완벽한 남자’라 불렀고, 그 유전자가 어떻게 이렇게 희미해질 수 있는지 의아해했다. 레이지의 외모는 그들과 달리 사람들의 기억에 남지 않는 종류였다. 본인은 자신의 날렵한 눈매를 매력이라고 믿었지만, 사람들이 그의 눈을 두고 사납고 짜증으로 일그러져 있다고 수군댄다는 사실은 상상조차 못했다.
아버지의 후광을 빼면, 그에게 내세울 것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 후광 덕분에 세상은 그의 작은 일탈에도 과도한 관심을 보였고, 레이지는 그 관심이 주는 짜릿함에 중독되어 갔다. 문제는, 그 관심이 언제나 아버지의 그림자 아래에서만 가능했다는 점이다.
비참함은 늘 그의 뒤를 따라왔다.
그러나 레이지는 그런 감정에 주저앉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는 상처받은 자존감을 타인의 상처로 보상받는 방식을 터득한 사람이었다. 누군가 힘들어하고, 당황하고, 무너지는 표정을 마주할 때면… 그 순간만큼은 세상이 자신의 발아래에 놓이는 것 같았다.
그 우월감! 그는 그것을 짜릿한 전율이라고 불렀다.
그 맛은, 그의 표현에 따르면, “찌질한 인간들은 평생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는 감각”이었다.
말 그대로 찌질한 인간들만 레이지를 두려워했다. 급이 비슷하다 생각한 인간들은, 오히려 레이지를 무시했다. 그래서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는 것을 택했다. 자신과 비슷한 재력의 부모를 두었으면서 레이지보다 더 잘난 무리들이 없는 세상. 레이지가 늘 꿈 꿔 오던 세상.
나다니엘은 레이지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런 세상을 찾아 헤맸다. 너무나도 잘나신 아버지. 아니지,
‘내가 축복을 타고 난 거야. 신이 날 사랑하기 때문이지. 내가 훌륭하기 때문에 모든 능력을 다 갖춘 인간의 자식으로 태어난 거지.’
그 사실을 모르는 무지한 인간들을 뒤로하고, 레이지는 새 세상에서 자신의 권력을 영원히 누리리라 여겼다.
하아아아……. 그렇게 됐어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이주한 인간들이 애새끼들을 쑥쑥 낳고, 그 애들이 또 애들을 낳고. 인구가 늘어야 자기 발아래 두고 지배할 맛이 날 텐데, 여자들 난자가 다 죽었단다. 게다가 더 이상 인간들은 영생도 못하게 됐다고 했다. 왜 이런 지랄 맞은 상황이 온 걸까? 완벽해야 할 세계가,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무너졌다.
‘신이 날 버린 걸까?’
아마 그건 아닐 것이다. 자기 안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헛소리하며 고귀한 척 하는 강률이 등장한 후 완벽했던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고 보는 게 맞다.
처음 등장할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강률이 등장한 순간 레이지의 거대한 배경이었던 아버지가 죽었다. 그리고는 인간들의 도덕성을 평가질이라도 하듯 못마땅하고 비참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마치 자신이 인간의 죄를 가르는 신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그 꼴이 얼마나 보기 싫던지…….
어느 날 강률이 홀연히 사라졌을 때 목구멍에 걸린 찹쌀떡을 토해낸 것처럼 속이 후련했었다.
강률이 사라진 3년 동안 레이지는 에덴스 아크에서 나름 존경받는 지도자로 잘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돌아왔다. ‘멸망’이라는 숙제의 해답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그리고 레이지에게 하는 말이,
“당신은 완벽하게 이중적인 사람입니다. 웃는 얼굴로 입바른 소리를 내뱉지만, 당신을 둘러싼 에너지는 끈적하고 사악해요. 레이지 당신은 절대로 우주 수호대가 될 수 없습니다.”
사악? 사악이라고? 지가 뭔데 날 평가해? 코딱지만한 나라의 촌구석에서 숨쉬기 놀이나 하던 새끼가. 감히.
정보실의 컴퓨터 앞에 앉아 ‘레이지 위트모어’를 검색하면 지구에서 화려했던 그의 이력이 수두룩하게 나온다. 40년 전의 레이지는 지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파파라치에게 찍힌 사진들 속엔 항상 쭉쭉빵빵한 여자들이 옆에 있었다.
자신의 과거를 음미하다 ‘강률’을 검색해 보았다. 이름이 ‘강률’인 몇 명의 인물이 나왔지만, 레이지가 증오하는 그 강률은 나오지 않았다. 그때 레이지의 뒤에서 슬그머니 머리를 들이미는 누군가 때문에 레이지는 화들짝 놀라 “뭐야!”하고 소리를 질렀다.
말리카였다.
말리카는 화면을 응시하며 피식 웃고는 의자를 끌어와 레이지 옆에 앉았다.
“흠, 사람 하는 생각이 별반 다르지 않나봐?”
말리카가 화면을 내리며 모르는 강률들을 훑어봤다. 레이지는 팔짱을 끼고 물었다.
“무슨 말이야?”
“당신도 에너지체를 얻는 방법을 알고 싶어서 강률을 검색한 거 아니야?”
말리카가 되물었다. 말리카의 말이 맞다. 레이지는 강률의 거부를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지금은 영생토록 권력을 누리겠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는다.
‘아갸가 나다니엘의 환생인지도 몰라.’
사람들 사이에 도는 이 말은 너무도 비위 상하고 무서운 얘기였다. 지금까지는 환생 같은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지만, 만약 진짜로 ‘환생’이 있다면? 죽음이 운명 지어진 인간들이 다음에 무엇으로 태어날지 누가 알겠는가?
‘내가 유인원으로 태어날 수도 있다고?’
그런 생각만으로도 레이지는 속이 울렁거렸다. 어떻게든 에너지체를 얻어야만 했다.
그런데 ‘사람 생각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말리카의 말을 되씹어보니 그녀도 에너지체에 대한 욕망이 있다는 의미가 된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말리카의 얼굴에 피식 웃음이 사라지고 분노가 일렁였다. 온 이성을 다해 간신히 누르고 있는 분노였다.
레이지도 그녀의 분노가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강률이 돌아온 날 에덴스아크의 모든 사람들 앞에서 말리카를 신랄하게 비난했으니 말이다. 당연히 수치스러웠을 것이다. 그 수치심은 시간이 갈수록 더 농익었을 테지.
“우주 수호대? 어디서 그런 유치한 발상이 나온 건지…….”
말리카는 다른 에너지체 배양자들을 비웃고는 검색엔진에 ‘안이서’를 입력했다.
“나다니엘이 원래 우주선에 태우려고 했던 사람은 강률이 아니야. 안이서지.”
화면에는 안이서의 강연, 출판한 책들이 우수수 떴다.
양심이니, 도덕이니, 이데아니, 내 안의 신성이니……. 뭐 그렇게 할 말이 많은지.
다 치워버리고 드디어 그들이 원하는 정보를 찾았다.
[정돈된 몸과 마음으로 들숨과 날숨의 길이가 같게.
들어오는 숨이 단전까지 내려갔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개개인마다 가능한 숨의 길이로 시작한다. 3초 들이마시고, 3초 내쉰다.
그렇게 시간을 천천히 늘린다.
욕심 부리지 마라.
숨 쉬는 게 힘겹게 느껴지면 안 된다.
이 과정에는 특별한 재능이 필요하지 않다.
들숨 1분, 날숨 1분까지 시간을 늘린다.
그럼 단전에서 배양된 에너지가 커지며 에너지의 몸이 만들어진다.]
레이지와 말리카는 화면에서 눈을 떼고 ‘이게 다야?’하는 표정으로 서로를 멀뚱히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