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리스 에테리아

원수들

by 안이서

원수들


말리카와 레이지에겐 달리 방도가 없었다.

[한국 전통 호흡법] 안이서의 설명만으로는 너무 간단해서 사기 맞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그들이 살아남을 유일한 방법인 것 같았다.

두 사람은 ‘해보자’도 ‘하겠다’도 ‘말겠다’는 말도 없이 시큰둥하게 정보실을 나왔다. 그래도 둘 다 미친 듯이 매달릴 거라는 건 알았다.


영상 속의 이서를 보고 말리카는 잠들어 있던 분노가 되살아나는 걸 느꼈다. 나다니엘이 저런 촌스러운 아줌마 때문에 자신을 버렸다. 물론 30년도 더 전의 이야기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이 아니야.”

그의 마음이 식었다는 건, 처음 잠자리가 끝나기도 전에 알았다. 그는 애써 실망한 표정을 감췄다.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말리카는 자신이 얼굴, 몸은 물론 뇌까지 섹시하다고 믿었다. 그녀가 아는 모든 남자는 그녀의 가치를 인정했다. 나다니엘도 처음에는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말리카는 나다니엘을 만족시키려고 자기가 아는 모든 기술을 시도해 보려 했지만, 처음 그녀를 끌어안고 키스한 후로 그의 호기심은 식어버렸다.

‘그래, 생각해 보니 나다니엘이 내게 보인 건 호기심이었어.’

서재에서 안이서를 바라보는 애틋한 그의 표정이 잊히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다니엘이 말리카를 바라보던 시선과 안이서를 보던 시선의 차이가 정확하게 구분이 됐다.

말리카를 보던 시선은 ‘이 사람 뭐지?’하는 호기심이었고, 안이서를 보던 시선은 ‘이 사람이야!’하는 깨달음과 그리움이었다.

둘 사이에 처음부터 말리카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건만,

‘내가 어떻게 해야 나다니엘이 내게 마음을 열까?’

나다니엘은 그녀를 희망 고문한 것이다.

지금 그 사실을 깨달으니 분통이 더 터졌다. 사람을 조종하는 건 말리카 그녀였어야 한다. 다른 누군가에게 조종을 당한다는 건 그녀 존재 자체가 무너지는 일이었다.

그리고 자기에게서 남편을 뺏어간 여자의 제자가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었다.

“거짓으로 점철된 이 사악한 여자야, 네가 입을 벌릴 때마다 똥내가 진동한다! 네 뻔뻔한 낯짝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당장 내 앞에서 꺼져라!”

말리카의 얼굴에 열이 올라오고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분노로 숨이 거칠어져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강률의 거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리며 그녀의 영혼을 찢어 발겼다.

‘죽여 버리고 싶다.’

떨리는 주먹을 진정시키려 벽에 손을 짚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며 진정을 좀 시키니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서 있는 곳은 우연히도 세라이아의 방 앞이다. 말리카는 짚은 벽이 죽은 시체라도 되는 듯 화들짝 벽을 짚었던 손을 뗐다. 그리곤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얼마 전까지도 그녀의 훈장처럼 자랑스럽던 아들, 세라이아.

지금은 그 존재가 말리카의 머리와 마음을 혼란스럽게 휘젓는다.

나다니엘이 유인원으로 환생한 거라면, 그 유인원을 유난히도 챙기는 세라이아는?

수십 년 전 말리카에게 의문스런 수치심을 안겼던 안이서의 환생인걸까?

말리카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살짝 열어 좁은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유인원은 잠자는 듯 침대에 누워 있고, 세라이아는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누워 유인원의 이마에 손을 얹은 채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다시 문을 닫은 말리카의 입에서 허무한 웃음이 작게 터졌다. 세라이아가 안이서의 환생이 맞다는 확신이 그녀의 마음에 인장을 찍었다.

‘내가 그년의 환생을 아들이라고, 몇 십 년 동안 애지중지 했었구나.’

그런 생각이 드니 숨이 다시 가빠졌다. 이곳에는 그녀 편이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모두가 다 원수다.

‘다 죽여 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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