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명동중앙극장 아르바이트
돌이켜 보면 그런 순간이 있다.
와. 그때였구나.
그때 나는 큰 갈림길에 서 있었고
중요한 선택을 했던 거구나.
그런데 아주아주 가끔은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지금 밟고 서 있는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때도 있다.
와. 지금이다.
어떤 방향이든 지금 하는 선택은
진짜 큰 선택이다.
감사하게도 나의 20대는
직감이 아주 찬란하게 발휘되었는데,
덕분에
기회는 어떻게 찾아오고
또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실전문제를 풀며 인생을 배울 수 있었다.
오늘부터 그동안 지나쳐 온
교차로를 하나씩 기록해보려 한다.
3학년 2학기 종강을 한 달 정도 앞두고
아르바이트가 필요했다.
다음 학기는 휴학을 하고
미국 큰집에 있다 오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비행기 티켓팅 비용과 미국에서의 생활비가 필요했다.
나는 아르바이트 경험이 별로 없었는데
철없이 용돈 받아 쓰다 보니 돈이 아쉬운 적도 없었고, 결정적으로 아빠가 아르바이트를 반대했다.
당시 아빠는 "그거 해서 버는 돈보다 그 시간에 뭐라도 더 배우는 게 훨씬 비싼거야" 라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태도로 일관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빠가 어떤 마음에서 한 말이었을지 금방 알아차리겠는데.. 그땐 그저 내 생활의 간섭이자 가부장적 통치라고 치부했다.
하지만 미국행을 결심했을 때는, 2008년 미국발 국제외환위기로 아빠회사가 심각한 부도를 당한 따끈한 시절. 아빠는 내 아르바이트 같은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나도 더 이상 모른 척하며 부모님 돈을 받을 수 없었다.
또 아르바이트 경험이 없다 보니 '아르바이트'에 대한 순수한 접근이 가능했다. 아르바이트가 돈과 시간의 물물교환이라면 그건 너무 불공평한 거래 아닐까? 내 시간이 얼마나 비싼데? 스물네살 김유나의 시간. 와우. 나는 스물넷에 서 있었지만 스물넷은 정말 누가 봐도 탐나고 아름다운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이걸 감히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 나는 정말 부자 중의 부자라는 놀라운 비밀을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아르바이트는 애초에 투자일 수밖에 없는 것! 투자자가 되어 가장 가치 있는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나의 아르바이트는 반드시 내 시간뿐 아니라 마음까지 쏟을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 애초에 성에 안 차는 돈 따위, 받지 않는다 해도 얻을 게 있는 그런 일.
그 당시 나의 시간은 영화를 보는 데에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었다.
언더그라운드 습성을 어디 버리지 못해 스폰지하우스, 씨네큐브, 씨네콰논, 씨네코드 선재 등 주로 강북에 있는 작은 영화관들을 전전했다. (또 의외로 학교 미디어실에서 당시에 구하기 힘든 영화들을, 그것도 엄청 방대한 자료들을 빌려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해 바로 그곳에 내 등록금의 참의미가 있음을 발견하고 자주 들락날락 거리던 시절이었다.)
극장 중에서도 종로 스폰지하우스와 인디스페이스가 있던 명동의 중앙극장은 위치도 좋고 영화 라인업도 풍성해 가장 자주 가는 곳이었는데 어느 날. 그곳에 붙어있는 <아르바이트 모집> 공고를 그냥 지나칠 리 없지 않은가? 호호호 *^^*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다면, 아직 종강까지 한 달도 넘게 남았는데... 학교를 다니면서도 할 수 있는지...
뭐, 일단 연락부터 하고 봐야지!
저런...
이미 채용됐다고...
공고를 아직 안 떼었나 보다고...
아 단골극장에서의 일이라니!
잠깐이라도 정말 설레는 상상이었다.
아...
이미 활짝 열린 마음이라
좀처럼 닫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장문의 편지를 한 통 썼다.
나에게 왜 중앙극장이 특별한지
내가 왜 중앙극장에서 일하고 싶은지
언제라도 또 자리가 나온다면 먼저 기회를 주실 수 있는지
봉투에는 좋아하는 빨간색 동그라미 스티커로 마감을 했던 기억이 난다.
평소처럼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중앙극장에 들렸다. 중앙극장은 당시 50년 역사를 가진 영화관으로 손만 빼꼼히 집어넣을 크기의 두더지 구멍으로 티켓팅을 했는데, 매표소가 영화관 안에 있는 게 아니라 대로변에 있는 영화관 입구에 바로 있어 굳이 영화를 보지 않더라도 오고 가는 사람이 자주 눈을 두고 가는 곳이었다. 나는 그 두더지 구멍으로 빨간 스티커가 붙여진 편지를 넣었다. 약간... 너무 주책인가? 싶었지만, 아님 말고! 하는 가벼운 심정이었고, 오히려 그렇게까지 했기 때문에 잠깐이나마 크게 설렜던 마음을 접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한 달 동안 이리저리 촉을 세우고 다녀도 중앙극장만큼 설렘을 주는 투자의 기회는 오지 않았다.
드디어 종강이 코앞!
이제 방학이 시작되는데... 바로 돈을 벌지 않으면 미국행에 큰 차질이 생기는데...
드디어 마지막 기말고사 날.
시험을 마치는 대로 알바사이트에서 적당한 걸 찾아봐야지... 생각하고, 시험지를 내고 나와 바로 도서관으로 향했다. 겨울이라 해도 제법 일찍 지고 어스름한 이른 저녁이었다. 미뤄왔던 책도 빌리고 인터넷도 하다가 알바 좀 알아보고 가야지! 보고 싶던 책의 위치를 찾아 메모지에 적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던 중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김유나씨죠?"
그 순간이었다.
직감의 날이 날카롭게 빛났다.
"집이 분당인데 아침 9시까지 매일 명동으로 올 수 있겠어요?"
지금이다.
정말 중요한 선택이다.
당연히
조금의 재고도 없다.
"그럼요. 당연하죠"
나는 종강하고 바로 다음 주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월화수목금 9시부터 5시까지.
워낙 잠 많고 잠을 특별히 좋아하는 내가.
학교도 주3으로 다녔던 내가.
거의 매일 아침 9시 전
극장에 도착해 오픈을 준비했다는 것은
앞으로 백번을 더 곱씹어도 얼떨떨할 사건이다.
극장에서 일하며 나는
감히 예상치도 못한 많은 일을 겪었다.
이틀에 한 번꼴로 공짜 영화를 봤고,
영화 포스터를 자주 얻었고,
진짜 큰 관에서 진짜 야한 영화(숏버스)를 어떤 아저씨와 둘이서 봤고(나중에 나오는데 서로 민망)
개인적으로 영화 보러 오는 영화인들을 자주 봤고(박진희 자주 옴),
영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알게 되고,
좋아하는 영화를 두번 세번 네번 극장에서 보게 되고,
텅 빈 영화관에서 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멍 때리기도 하고,
영화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내 인생에 강북에서 나고 자란 최초의 사람들이었는데, 살면서 강남을 한번인가 두번밖에 안 가봤다는 말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지금도 놀란 가슴이 기억나고,
입장시간 지났다고 안 들여보내 줬다가 자칭 영화평론가 아저씨랑 싸우기도 하고,
매표소는 기본 1명, 교대시간만 두명이서 일하는데 같이 일하는 언니랑 그 깨알같은 시간에 같이 성경책을 읽었고,
필름이 돌아가는 영사실에서 영화를 보기도 하고,
친구들을 자주 영화관으로 오게 하고,
미국행 티켓팅도 하고,
꼬불꼬불 미로같은 극장의 비밀통로를 다니고,
극장 옆 할머니국수가 정말정말정말 맛있어서 자주 김밥과 비빔국수를 먹고,
할머니국수 집에 다이어리를 놓고 왔는데 주인아주머니가 보내주신 "다이어리 놓고 가셨어요" 문자에 감동했었고,
일하지 않는 날도 영화를 보고 할머니국수를 먹었고,
이주연의 영화음악에 "안녕하세요. 중앙극장에서 일하고 있는~" 사연을 두번 보냈는데 두번이나 나왔고,
영화 <워낭소리>가 독립영화계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것을 현장에서 지켜봤고,
이명박 정권에서 영화인들이 큰 탄압을 받고 있음을 가까이에서 느꼈고,
광우병 때는 극장 바로 앞에 매일같이 진압경찰들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들면서도 시위는 강 건너 불구경했고,
김수환 추기경이 돌아가셨을 때 명동성당에서 시작해 극장까지 이어진 조문행렬에 신기해했고,
마지막 날까지 지각 한번 없이 즐겁게 일했고,
어떤 날은 청소하는 분이 따로 계신데도 일찍 도착해 관객들이 들어오는 문을 닦기도 했고,
미국에 다녀오고 다시 복학을 하고 나서 중앙극장이 없어질까봐 노심초사했고,
없어진다없어진다 얘기가 나오고 반대하는 사람들과 충돌했을 때 무서워서 피하기도 했고,
결국 없어진다 결정됐을 때.
마지막 상영이 끝난 어느 날.
한 때 매일같이 내 손을 내밀어 영화표를 건네던, 귀여운 두더지 구멍이 있던 그 유리창문 앞에 섰을 때. 극장에서 써 내려간 마지막 인사와 그 위에 붙여진 사람들의 인사를 쓰다듬으며 나는 한참을 울었다.
날마다
날마다
꼭꼭 씹으며 보낸
생생한 시간들
매일 지나가는
경부고속도로 위에서
지금 내 인생이 정말 아름답게 빛나고 있는 거 같아!!!!!!!!!!!! 라고 외쳤다.
완벽한 투자였다.
투자금 회수 10000000000%
명동극장 아르바이트 투자 건으로 인해
내 인생은 두가지 뚜렷한 기준이 세워졌다.
1. 좋아하는 일에 내 시간을 투자할 것
2. 맡은 일에 마음을 다 할 것
좋아하는 일을 쫓는 것은 학생 때에 계속 해오던 훈련이었는데
그것을 돈과도 연결해 본 실험은 거의 처음이었다.
또 '마음을 다 한다' 는 것은 실험의 결과로 얻은 것인데
그것이 어느 정도의 무게인지를 깨달아
모든 관계에서 마음을 다잡고, 끌어올리게 하는 기준을 갖게 되었다.
와. 지금이 인생에서 진짜 중요하겠는데? 싶었던 순간들.
나중에 돌아보면,
과연 분기점이었다.
그런데 지금에서야 발견한
또 하나의 깨달음은
그것이 정말 중요했기 때문에
분기점이 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중요하겠다는 직감으로 만났고,
계속해서 중요하다고 여기며 마음을 쏟았기에 중요해져버린 것이다. 한 순간의 선택에 머문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내 인생에 살아숨쉬는 영향으로 남게 된 것은 선택이라는 대단한 사건 뒤에 이어진 무수한 컷들 때문이었다.
우연을 믿지 않기 때문에
늘 '우연처럼' 이라고 말한다.
중앙극장이 내 인생에 들어왔듯
우연처럼 만난 중요한 ‘일’을
계속해서 기록해야지!
그래서 ‘중요한 일기’ 라는 제목을 붙여보았다.
(2편에서 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