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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혁명의 격정과 원초적 욕망 사이

옌롄커 소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에 대한 단상

by 새벽


성(聖)스러운 혁명 슬로건의 성(性)적 전복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중국 사회주의 혁명의 상징적 표어이자 중국공산당의 금언과 같은, 단언컨데 지금까지도 중국인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혁명 정신의 정수이자 경전 그 자체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말은 마오쩌둥이 탄광 사고로 숨진 장쓰더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한 연설에서 비롯된 말로서, 중국 공산당의 존립적 가치 기반을 상징적이고도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옌롄커는 이 소설에서 혁명적 도덕성과 책임감을 의미하는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이 말을 지극히 개인적인 언어로 전유하며, 원초적인 욕망의 언어로서 원래의 의미를 파괴적으로 전복하고 있다.


혁명에 대한 자신의 사명과 책임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있는 사단장의 집 한가운데는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나무 팻말이 놓여있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천년 묵은 관짝”과도 같은 이 팻말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과 모든 사심을 억누른 채, 혁명의 기치만 비정하게 내세우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시대는 그러했다. 혁명의 격랑이 세상을 뒤덮었고, 그 정신이 일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모든 사고와 행동은 혁명을 위한 것이라야 했다. 당시 사람들은 혁명이 가진 폭력성 앞에 몸과 정신을 내어주어야 했다. 본성은 혁명이라는 기치 아래 책임과 헌신을 강요당했고, 본능은 혁명 정신에 의한 승화를 강요당했다. 인간성에 대한 소외는 절망과 고통에 자리를 내주었다.


혁혁한 혁명의 공을 세우고도 사내구실을 하지 못하는 사단장은 마치 허울뿐인 가장이요, 겉만 요란한 혁명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 겉다.사단장의 젊은 아내 류롄은 그가 장기 출장간 틈을 타 식사를 담당하는 취사병 우다왕과 원초적 욕망의 관계로 발전한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그 나무팻말이었다. 나무팻말이 원래 있던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옮겨지면 우다왕은 류롄과의 약속대로 인민을 위해 ”복무“하기 위해 사단장의 집 2층으로 올라간다.


원래 “복무”란 대가성 없는 희생과 헌신을 의미하는 혁명의 가치였으나, 소설에서의 “복무”는 성애적 묘사로서 지극히 개인적이며 원초적 욕망의 언어로 탈바꿈된다. 또한 소설의 모든 혼인 및 원초적 관계는 복종 또는 계약이라는 위계 속에서 발생하며 대가가 발생하지만, 류롄과 우다왕은 일탈적이면서도 본능에 충실한 관계를 통해 잠시나마 혁명이 아닌 지극히 사적인 감정에 도취됨으로써 인간성의 회복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혁명에 의해 소외되었던 인간 본연의 자연스러움의 회복이자, 혁명의 색깔로 물들었던 억압된 일상으로부터의 귀환이었다. 특히,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고 사랑의 맹세를 주고받는 장면에서 마오쩌둥의 어록을 찢는다든지, 마오쩌둥 석고상을 산산조각내는 장면은 혁명의 경직성과 폐쇄성을 단번에 파괴하고 부정하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격정과 욕망을 드러내고자 하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가장 신성시 되는 상징적 존재와 그 경전과도 같은 금언은 인간의 심연 속 가장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욕망과 그것에 대한 동경에 의해 너무나 쉽게 부서졌다.


혁명은 너무나 쉽게 권위와 폭력을 사용했고, 그 대가로 주어지는 것은 자본주의의 그것보다 간편했다. 소설에서는 혁명의 모순과 불완정성을 혼인관계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사단장은 자신이 가진 지위로서 류롄을 점찍어 데려왔고, 류롄은 혼인으로서 명예와 지위를 얻었다. 우다왕은 결혼을 조건으로 혁명의 대오에 합류했다. 입당하여 공을 세우고 아내와 자식을 농촌에서 도시로 데려오겠다는 서약서를 체결하고 결혼한 것이다. 이들의 결합은 사랑보다는 계약에 기반하고 있으며 조건에 해당하는 대가를 치룸으로써 인간성의 소외와 정서적 공허를 경험하게 된다.


류롄과 우다왕 역시 명령과 복종이라는 위계적 질서 안에서 출발했지만 이후 원초적 욕망을 나누는 관계로 발전하면서 혁명으로부터 일탈적 해방을 맛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사단장이 돌아오면서 그 둘의 관계는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우다왕과 류롄은 다시 혁명의 정서안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둘 사이의 애정은 대가를 지불하는(또 지불받는) 비정한 관계 안에 표류하게 된다. 류롄은 다시 외로운 결혼생활로 돌아갔고, 우다왕은 안정적인 직업과 도시 호구를 얻게 된다. 류롄과 우다왕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일탈적 해방에 대한 갈망으로 절망과 고통에 빠져들게 된다.


이 작품은 중국에서 왜 문제작인가?

신격화된 마오쩌둥의 지위를 허물고 혁명의 폐쇄성과 비정함에 자리를 내준 인간성의 회복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사회주의 혁명이 지나간 자리에는 그 상처와 치유에 대한 수많은 문학작품이 출현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그 고통과 절망을 직시하고자 하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미완의 혁명이 배태하고 있는 불안감과 불완전함 때문일 것이다.

중국의 혁명은 아직도 중국식 사회주의와 같은 다양하고도 다른 이름으로 지속중이며 그 여정은 여전히 실험대 위에 놓여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의 과거 경험은 미래를 내다보기 위해 반추해야할 고통스런 심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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