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일 모른다고 하지만..

임종을 못 지킬 줄이야...

by 이상한 엄마

살다 보면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철저하게 계산하고 계획해도 안 되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어찌 보면 인생의 모든 것이 그러했다. 학창 시절 성적, 교우관계, 입시, 연애, 취업... 다 내 예상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지만 그럼에도 나의 오랜 단짝 친구이자 소울메이트인 내 할머니의 임종을 못 지킬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맞벌이인 엄마,아빠를 대신해서 사실상 키워주신 분이다. 어린 시절 늘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먹여주고 재워주고 때로는 나의 불안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시기도 하고 내 친구가 되었을 뿐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가 가는 곳은 어디든 따라다녔더랬다.. 심지어 계원(할머니 동네 친구들)들과 여행을 가도 난 따라갔더랬지.. 그래서 할머니 친구들도 나에겐 또 다른 친구였다. 그래서 훗날 내가 성인이 되고 사회생활을 할 때도 젊은 직원들은 꺼려하는 노령의 어르신들도 크게 불편하지 않게 대하게 된 거 같다.


커가며 할머니 친구들이 한분 두 분 돌아가시는 소식을 들을 때도, 나에겐 너무나도 정정하고 정신도 또렷한 내 할머니였기에 그런 일이 일어나려면 까마득할 거라 생각했다. 엄마보다 기억력 좋으시고 정정하고 꼿꼿한 할머니지만 허리를 크게 다치시고 몸져누우신 후 몇 년을 요양병원, 요양원 생활을 하시며 기억력도 흐릿해지셨고 여기가 어딘지, 지금이 며칠인지도 헷갈리셨으나 나를 보면 본인이 키운 손녀라는 건 또렷이 아셨고 우리 첫째(할머니에게는 증손녀)도 인지하고 계셨으니 이만만 해도 좋다 생각했더랬다..


둘째를 임신하고 만삭 무렵 친정 대구에 내려갔다. 어려서부터 친정에서 할머니를 모시며 지냈지만(모셨다기보다 같이 살았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겠다) 할머니가 허리를 다치시고 대소변 조절이 안되면서 어쩔 수 없이 요양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었고 그 뒤로 집에 다시 돌아오지 못하셨다..


당시 할머니가 호흡기 감염 합병증이 있어서 감염내과에 입원해 계셨고 의사 선생님은 만삭의 임산부인 나에게 감염병동 입원실 출입을 반대하셨다.. 나랑 세 살 된 첫째 아이는 병원 로비에서 기다리고 남편과 친정부모님이 할머니를 뵙고 나왔다. 나는 출산해서 둘째 데리고 또 오면 되지.. 라며 발걸음을 돌렸더랬다. (지나고 나면 모든 게 결과론적이라 그런지 후회일 뿐이다. 그때 의사 선생님 권고 무시하고 입원실에 가볼걸..)


첫째를 자연분만하였기에 둘째도 당연히 자연분만할 줄 알았던 나는 끝내 둘째가 역아 위치에서 정상위치를 잡지 못해 제왕절개를 해야 했고 자연분만 대비 입원 기간도 며칠 늘어났고 회복도 늦어졌다.

퇴원과 동시에 산후조리원에 입소를 해서도 배에 그인 칼자국과 꿰맨 곳은 여전히 진물도 나오고 아파서 거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조리원에 입소한 당일 저녁 갑자기 친정 부모님께 전화가 하고 싶어 통화 버튼을 눌렀으나 연결음만 들릴 뿐 통화가 되지 않았다. 30분 정도 뒤.. 친정엄마의 울먹이는 목소리와 함께, 할머니가 방금 임종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고 , 돌아가실 상황이었는지도 몰랐기에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아무 감흥도 느낌도 없이 멍했다고 해야 하나..


정신을 가다듬고 알아보니 내가 출산할 무렵부터 상황이 안 좋으셨고 출산일을 코 앞에 앞둔 상황에서 어차피 대구에 내려가지도 못할 것이기에 말씀을 안 하신 듯했다... (그래도 이건 지금 생각해도 너무 했다..)

마침 할머니 임종 중에 내가 전화를 한 것이었고.. 그때 할머니 귀에 내 목소리라도 들려주지.. 그 아쉬움이 아직까지 내 마음에 있지만..


할머니 임종을 내가 못 보는 일이 생길 줄이야?? 말도 안 된다 생각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했던 말이 있다..난 할머니가 죽으면 관 속에 따라 들어갈 거라고 했다.. 할머니가 없는 상황은 어린 시절 나에게 무척 큰 불안이었고 부재였다. 그래서 차라리 관 속에 따라 들어가 있으면 더 마음이 편안할 거라 생각했나 보다..


그런 내가 임종을 못 지켰다고? 장례식 간다며 조리원 원장에게 (장시간 외출은 허락이 필요했다) 말하니 필수 진료 이외 외출은 불가하고 심지어 타 지역에 장례식장을 다녀오는 건 감염위험(모체로부터 신생아도 감염될 수 있고 자칫 조리원 전체의 안전에 해가 된다는 거다)이 있어 퇴소해야 한단다..

그럼에도 대구 가려고 준비하는데 엄마한테 전화가 온다. 할머니가 원하시지 않을 거라는 거다..

배에 칼자국이 여전히 아물지도 않고 제대로 걷는 것도 힘든데 어떻게 서울에서 대구까지 오냐며.. 할머니가 그걸 원하시겠냐는데.. 그 상황이 참 야속했다..


남편과 논의 끝에 남편만 대구를 보내고 나는 조리원에서 아이와 있기로 했다.. 그리고 둘째가 백일이 지나고 이백일이 지나고 돌이 지났지만 나는 대구를 내려가지 않았다.

대구를 내려가 할머니의 부재를 직접 목격하면 돌아가신 게 현실이 되는데, 지금 상황은 그냥 할머니가 요양병원에 장기 입원하시고 나는 대구가 아닌 타지에 있어 자주 못 보는.. 그런 상황과 다를 게 없다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현실을 받아들이고 마주하는 데는 둘째가 두 돌이 지나서야 가능했고 그때 할머니의 무덤 앞에 갈 수 있었다..


" 할머니 안녕? 나 왔어, 내 꿈에 자주 좀 나와주면 안 될까? 할아버지 만나서 좋아? 허리는 이제 안 아프고??.."


정말 돌이켜보면 정작 중요한 것은 내 계획대로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내 인생에서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고 가슴 한편 부재로 남을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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