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스테라 May 21. 2021

안녕, 리투아니아

오리엔테이션


8/28 Monday


 아침 일찍 9시부터 강당에서 수업 관련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하고 점심을 먹은 후 각자의 학부 건물 앞에서 만나서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중학교 강당을 떠올리게 하는 나무 바닥재로 마감된 강당에서 나는 E와 나란히 앉아 절반은 못 알아듣는 유럽식 영어를 기를 쓰고 청취했다. 혹시 이거 알아들었어? 아니. E는 이거 알아들었어? 나도 아니. 하며 우리 둘은 낄낄거렸다. E가 있어 다행이라고 내심 생각했다. 수강 신청같이 중요한 내용은 다 숙지하였으니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했다. 동아리도 여러 가지 있었는데 마침 페미니즘에 눈을 뜨던 시기여서 여성 동아리에 참여하고 싶었으나 여행만으로 일정이 바쁠 것 같아 금세 마음을 접었다.


 듣기 괴롭고 지루했던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후 앉은자리에서 셀카를 찍고 있었는데 뒤에서 키 큰 건장한 검은 남자가 다가와서 내 포즈를 따라 했다. 그의 이름은 Thakzan, ‘탘흐잔’이라고 발음한다. 발음하기 힘들어서 우리는 그를 타코라고 불렀다. 타코는 말레이시아계 혼혈인으로 독일에서 왔고 사람 만나길 좋아하는 그는 교환학생 중 유일한 동양인인 우리 둘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다. 예상대로 그는 나루토와 지브리 같은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고 했다. 동양 문화에 거의 무지한 유럽인들은 동양인을 보면 모두 일본 아니면 중국에서 온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동양에는 카자흐스탄 같은 중앙아시아도 있고, 인도도 있고, 태국과 같은 동남아시아도 있는데 말이다. 타마르 다음으로 말을 걸어준 친구였지만 조금은 미심쩍은 마음으로 인사를 하고는 페이스북 친구를 맺었다.


 이곳에서는 아직 인스타그램보다 페이스북이 더 유행인 모양이었다. 학교의 모든 이벤트와 진행 사항들을 페이스북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이벤트 페이지에는 가까운 해변으로 1박 2일 여행 가는 씨사이드 트립, 웰컴 파티, 리투아니아의 수도로 당일치기 여행하는 빌뉴스 시티투어 등에 참여 여부 표시도 가능했다. 가장 가까운 일정이었던 빌뉴스 시티투어는 아침 7시에 버스가 출발하길래 일찌감치 포기했다. 가까운 곳이어서 다음에도 충분히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조용한 기숙사에 남아있고 싶기도 했고.


기숙사로 가기 전에 기숙사 옆 건물에서 학생용 충전식 유심칩을 나눠준다길래 E와 함께 이동했다. 드디어 와이파이의 노예에서 해방되는 건가 싶었다. 이 충전식 유심칩은 iki에 가서 카드를 보여준 후 충전해야 하는데 한국 돈으로 만 사천 원 정도인 12유로를 내면 한 달은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리투아니아, 특히 기숙사 와이파이는 자주 끊기고 속도도 느려서 애인과 영상통화를 하다가 답답해서 끊어버린 적이 여러 번이었다. 이제 더 이상 버벅거리면서 영상통화를 안 해도 된다는 생각에 들떠 기숙사로 돌아와 바로 영상통화를 했다.


기숙사에서 점심 식사 후에 학부 오리엔테이션에 가야 했는데 슈퍼 내향인인 데다가 건축 학부 건물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나는 겁을 먹었다. 마침, 내 이탈리아인 룸메이트 마르티나가 도시공학으로 같은 학부여서 방에서 같이 이동했다. 마르티나는 아름다운 해변으로 둘러싸인 작은 섬에서 온 친구다. 작은 얼굴을 다 가릴듯한 안경을 쓰고 치마보다 바지를 선호하는 그는 말수가 적었다. 혹시 나를 싫어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방에 짐만 풀어놓은 채로 여행을 다녀와서 나와 거의 초면인 상태였다. 우리 둘은 말없이 두 마리의 개가 있는 집 마당을 지나, 졸졸 소리가 나는 시냇물 위의 다리를 지나, 가파른 계단을 지나 건축 학부 건물 앞에 도착했다. 회색의 건축학부 건물은 처음 갔던 건물보다 수수했지만 깔끔했다. 그는 같은 이탈리안 친구들을 만나더니 말을 분수처럼 쏟아냈다. 그들 곁에서 마르티나는 생각보다 잘 웃고, 말이 많았다. 그리고 그 잘생긴 친구들을 소개해줬다. 서너 명이었는데 그들의 이름은 전부 기억이 안 났다.


이어 리투아니아인 건축학부 학생회 친구들이 나와 간단한 아이스브레이킹 겸 게임이 시작되었다. bzz게임이라는 거였는데 bzz소리를 내며 꼬리잡기를 하는 게임이었다. 이런 게임에는 영 소질이 없는 나는 속으로 제발 걸리지만 않게 해 달라며 빌었다. 다행히도 게임은 애매모호하게 승자도 패자도 없이 끝났다. 목소리가 얇은 어떤 남자 학생회 임원이 이제 학부 건물 투어가 시작될 거라며 자신을 따라오라고 알렸다. 건물은 외관처럼 내부도 깔끔하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 입구 바로 정면에는 잘못하면 발이 빠질 것 같은 뚫린 긴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고 우측으로는 통유리로 햇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빈백과 간식 자판기가 마련되어 있어 우주 공강 시간도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름도 생소했던 카우나스라는 도시에 점점 더 놀랐다.


위층에는 익숙한 강의실의 모습이 늘어져 있었다. 맨 앞에서 뭐라고 소리를 내는 얇은 목소리가 들렸지만 뒤쪽에 있었던 우리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마르티나는 이미 이탈리아인 친구들과 저 앞쪽에서 듣고 있었고 뒤쪽으로 멀어진 나는 옆에 있는 프랑스인, 스페인인 친구와 함께 나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기숙사 침대에 드러누워 게을러지고 싶은 날이었다. 나와 같이 탈출에 성공한 스페인인 친구는 구두 소리를 또각또각 내며 나는 이 소리가 너무 좋아서 구두를 신는다고 떠들어댔다. 그녀가 내뱉는 영어의 속도는 너무 빨라서 들리는 단어들을 조각모음 해 유추해낼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없는 방에 드러누워 오랜 시간을 보냈다. 마르티나는 그 친구들과 놀러 갔는지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심심해진 나는 곧 그림이 그리고 싶어 져 구글 지도로 검색해 알게 된 쇼핑몰 MOLAS로 향했다. 가는 길의 해가 저무는 하늘은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한국에 있는 애인과 이 순간의 모든 것을 공유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음이 한탄스러웠다. 사무친다는 말로 밖에 설명이 안 되는 이 감정을 스물넷에 처음 느꼈다. 내일은 빨래를 꼭 하고 요가매트를 사고 말아야지.


작가의 이전글 안녕, 리투아니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