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일상이 지루한 건지, 우리의 관계가 지루한 건지 헷갈려. 음, 아무래도 권태기인 것 같아.
연애한 지 만 5년을 앞두고 그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전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기분 좋게 들어간 우아한 칵테일바에서 말이다. 머릿속이 하얘진다는 건 이런 기분일까. 갑자기 가슴이 쿵쾅쿵쾅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눈에는 뜨거운 물이 고일 것 같았다. 입술을 앙다물며 꾹 참고 그에게 말했다.
권태기라고 이름 붙이면 진짜 그렇게 되는 거지. 오래 만났는데 어떻게 항상 새로울 수가 있겠어.
친구들이 연애 중 권태로움을 느낀다고 이야기할 때 내가 항상 했던 이야기를 내 남자친구 앞에서 하게 될 줄이야. 별 거 아닌 것도 병이나 장애로 여기면 정말 그렇게 되는 것처럼, 연인 사이의 권태로움도 '지금 우리는 권태기인 것 같아. 생각할 시간을 갖자.'라고 이야기하는 순간, 진짜 문제가 되어버린다.
권태(倦怠): 어떤 일이나 상태에 시들해져서 생기는 게으름이나 싫증.
권태로움을 권태기라고 부르지 않는 건 현실을 회피하는 태도와 다르다. 연인 관계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익숙한 것, 오래된 것은 권태를 동반한다.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오랜 시간으로 인한 권태를 극복하지 못하고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선다 해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항상 새롭기만 한 건 없기 때문이다. 새롭다는 것은 '지금까지 있은 적이 없다'는 뜻인데, 새로움을 겪는 순간 그 의미가 깨지므로 계속 새롭다는 건 불가능한 셈이다. 그러므로 권태로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 다만, 이 시기를 권태기라고 부르면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 쉬우니 그렇게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우리의 말과 행동, 생각은 굉장히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니 섣부른 판단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권태로움은 그 자체로 자연스럽게 흘러 보내거나 이색적인 요소를 하나씩 첨가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남자친구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당시 그는 일적으로 굉장히 스테이블한 상태였다. 단조로운 일상이 반복되는 와중에, 오래 만난 여자친구와의 데이트는 항상 익숙하고 편안한 곳에서 비슷하게 이루어지니 지루했던 것이다. 나는 때로 그런 감정이 들 때면 그에게 '이제 데이트 준비 열심히 안 해도 괜찮다 이거지?'라며 장난스럽게 투정을 부리곤 했다. 하지만 그는 투정을 부릴 줄 몰랐다. 혼자 생각하고 결론을 짓는 게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안좋은 감정을 겉으로 크게 내색하지 않으려 하는 점잖은 사람이었다. 그러니 내가 알 도리가 있나. (그럼에도 연인으로서 내가 그를 좀 더 세심하게 살펴봤어야 했던 건 맞다. 내 무딘 성향이 이럴 때는 독이 됐다.)
권태기인 것 같다는 그의 발언이 처음에는 충격적이었지만, 자세한 속사정을 들을수록 나에 대한 감정이 변한 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의 마음과 그가 놓인 상황을 보다 가까이 들여다볼 줄 아는 여자친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에피소드는 오랜 기간 덕에 익숙해진 그의 배려가 결코 당연한 게 아니라는 것을, 그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되새겨보는 계기로 작용했다.
흔히, 잔소리하던 여자가 언제부터인지 말이 없어지고 그저 웃기만 하다가 남자에게 이별을 고하는 경우가 있다. 남자는 여자가 싫은 소리를 안 하니 이제 괜찮아졌나 보다 착각하지만, 변하지 않는 남자의 모습에 지친 여자는 홀로 조용히 그와의 관계를 포기하고 헤어짐을 준비한다.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에 남자는 당황하지만, 이미 뜨거운 감정이 정리된 여자는 차가운 모습을 보인다. 이렇듯 연인 사이의 위기는 조용히 찾아온다. 시끌벅적 크게 다투는 연인들은 오히려 서로 관계를 이어가려는 의지가 있기에 파이팅 넘치게 싸우는 것이다. 만일 연인이 평소와 달리 점점 조용해지고 있다면그리고 그 상대를 잃고 싶지 않다면, 둘 만의 프라이빗한 공간에서 깊숙한 대화를 시도해보길 권한다. 동상이몽은 생각보다 그렇게 먼 이야기가 아니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