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츠 7년 차, 지금 잠시 쉬어가고 있는 마르쿠스 씨
“아마 그때 내 모습을 상상도 못 할 거야. 나는 자주 소리를 질렀고, 내 상사와 갈등이 있었지. 하나의 프로덕트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모든 과정을 세세하게 신경 쓰느라 항상 곤두서 있었어. 모든 프로덕트가 내 아이 같아서, 그것이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프로젝트가 중단되거나 하는 일이 있으면 나는 며칠을 우울감에 시달렸어. 나중에 고혈압도 생겼고, 몸도 마음도 좋지 않았어.”
<마르쿠스와의 대화 중>
“네가 다음 직장으로 어디를 선택할지 무척 궁금해”라고 말하자 “나도 궁금해”라고 답하는 마르쿠스(Markus).
다가올 새로운 변화의 시간을 기꺼이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그에게 남들은 취직과 이직을 위해 열심히 관리한다는 그 흔한 링크드인 계정도 없다.
그렇다고 그의 이력서가 남들보다 못한 것이 아니다. 유럽에서 비즈니스 정보공학(Wirtschaftsinformatik)과를 최초로 개설한 실용주의 노선을 지켜나갔던 명문 푸어트방엔(Furtwangen)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인턴십으로 작은 에이전시 회사에서 일을 시작했다. 이후 독일 유명 IT 컨설팅 회사인 소프트웨어 AG(Software AG)에서 엔지니어와 프로덕트 매니저로 일을 하다 당시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다임러(Daimler)에 스카우트되어 승승장구 자신의 커리어를 이어 갔다.
하지만 이제 마르쿠스는 자신의 그 과거 커리어가 앞으로 새로운 일을 찾는 데 결정적인 조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서로 합을 맞추고 이해하기 위해 통상의 CV는 적어내겠지만, 그것으로 자신을 ‘셀링’ 하는 것에 큰 관심은 없다. ‘개인 브랜딩’, ‘개인 PR’이 참 흔한 이 시대와는 정반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만 그의 모습에서 오히려 자기와 자기 일에 대한 확신이 넘친다.
아마 마르쿠스는 여름쯤에는 새로운 직장을 찾을 것이다. 그러나 사뭇 다른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방문했던 취업 사이트는 들여다보지 않는다. 소셜 임팩트를 가진 일만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웹사이트 굿잡스(goodjobs.eu)에서 좀 더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다.
최근 베를린의 한 스타트업에서 프로젝트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나는 ‘일의 의미’에 대해 길고 깊게 생각해 볼 기회를 얻게 되었다. 바로 친구 마르쿠스를 만나게 되면서부터다.
마르쿠스는 세계적인 자동차 기업인 다임러 슈투트가르트 본사의 플릿보드(Fleetboard) 부문에서 프로덕트 오너(Product Owner)로 7년가량 일을 했다. 그리고 지금은 다임러를 그만두고, 소위 ‘갭이어’를 보내는 중이다. 누구보다 커리어가 화려한 글로벌 대기업 출신이 작은 스타트업 프로젝트 <잃어버린 반려동물 찾아주기 캠페인>에 아무런 보상 없이 참여한다는 것, 그 자체로 나는 그에게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마침 나는 번아웃이 오기 직전이었고, 아직 펼쳐보지도 못한 ‘내 커리어의 생애’의 벼랑 끝에 내몰려 있었다. 내가 다니던 직장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만약 이 직장을 그만두게 된다면, 이다음 기회가 있을지⋯ 삶은 불안하고, 정체는 흔들렸다. 그래서 마르쿠스를 만났을 때 ‘당신의 커리어에 왜 갭이어가 필요했는지’ 그리고 ‘갭이어를 보내고 있는 당신의 삶은 안녕한지’를 꼭 묻고 싶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일이 잘 될 때와 잘 안 될 때의 감정 기복이 상당했던 나와는 달리,
마르쿠스는 늘 같은 온도로 일을 대하고, 늘 비슷한 목소리 크기와 동작으로 의견을 표현했다.
마치 자신과 일에 최대한 거리를 두는 것과 같은 입장이었다. 일이 내 삶의 전부이고, 때로는 회사와 나를 동일시해서 일이 잘 안 되면 며칠을 우울감에 빠져 지내던 나와는 참 달랐다.
이런 마르쿠스도 다임러에 다닐 때는 달랐다고 한다.
“아마 그때 내 모습을 상상도 못 할 거야. 나는 자주 소리를 질렀고, 내 상사와 갈등이 있었지. 하나의 프로덕트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모든 과정을 세세하게 신경 쓰느라 항상 곤두서 있었어. 모든 프로덕트가 내 아이 같아서, 그것이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프로젝트가 중단되거나 하는 일이 있으면 나는 며칠을 우울감에 시달렸어. 나중에 고혈압도 생겼고, 몸도 마음도 좋지 않았어.”
그래서 결국 그는 일을 그만둘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독일 직장은 워라밸이 좋고, 한국보다 병가와 휴가를 마음껏 쓸 수 있기 때문에 직장에서 얻는 스트레스는 없을 것이라는 단순한 편견이 있었다. 한국보다 상사와 수평적인 관계고, 불필요한 회식 등이 없기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덜할 것이라는 선입견도 있었다. 하지만 독일 직장에서도 당연히 ‘정치적으로 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정치적인 상사들은 지금까지 잘 진행되어 오던 프로젝트를 하룻밤만에 엎어버리기도 했고, 없던 일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렇게 ‘일의 본질’은 사라지고, 일의 재미와 의미를 모두 잃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마르쿠스는 변화를 결심하고 다임러를 그만둔다.
그리고 내가 “갭이어에 무슨 일을 하면서 지냈어?”라고 물어보았을 때 그는 조용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나는 이것을 갭이어라고 생각하지 않아.
일을 쉬는 것이 내 삶에 ‘갭’을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거든”
마르쿠스는 일을 그만둔 지금의 생활이 자기 커리어의 ‘단절’도, 일을 잠시 쉬어가는 의미의 ‘갭이어’를 의미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마르쿠스는 “내 인생이 내 이력서 몇 줄로 정의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다임러를 그만둔 이후의 삶도 나의 인생이고, 나의 커리어라고 생각한다”며 자신의 철학을 밝혔다. 그렇기 때문에 직장을 그만둔 것은 ‘휴식’의 시간을 갖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삶을 보다 풍요롭게(enrichment) 만들기 위한 시간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는 일을 그만두고 6개월 동안 자기가 사는 슈투트가르트의 한 유기농 농장 공동체에서 일했다.
독일에는 국가 차원에서 사회자원활동(BFD, Bundesfreiwilligendienst)을 장려하는 BFD 프로그램*
이 있다. 마르쿠스도 다임러를 그만두고 바로 동네의 BFD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공동체 ‘프로인데 발도르프(Freunde Waldorf)’로 향했다. 농장에서 일하고, 같은 공동체 안에서 생활하는 정신적/육체적 장애인들을 돌봤다.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코로나 시기라 바깥 활동을 자제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장애인들이 머무는 숙소 안에서 나올 수가 없어 답답해하던 시기도 오래 지속되어 고생이 더 컸다.
*BFD 프로그램: 독일에서는 독일식 수능인 아비투어가 끝나면 바로 대학을 가는 것이 아니라 1년가량 여행을 가거나 BFD프로그램을 통해 사회에 참여하고 기여하는 활동하는 친구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보통 주 40시간의 풀타임 봉사 활동인데, 이 자원 활동 기간 동안 매달 약 200유로가량의 활동비, 식사, 교육 기회 등이 제공된다.
회사를 그만두기 직전 코로나가 시작되고 얼마간 온라인 미팅을 통해서만 사람을 만났고, 사람과의 물리적 접촉은 적어졌지만, 정신적 충돌은 심해졌다. 그래서 다임러를 그만두고 나와서 일하게 된 그 공동체에서 30~40명의 사람들과 부대끼며 지내야 했던 그 시간이 마르쿠스에게는 축복과 같았다. 코로나 락다운으로 외로울 틈도, 심심할 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일’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1년을 변화의 시간으로 계획하고 퇴사를 했다. 6개월은 장애인 공동체에서 일하고, 6개월은 여행을 할 참이었다. 하지만 도무지 코로나 상황이 나아지지 않아 계획을 바꾸었다. 이후 6개월 동안은 자원 활동으로 인연을 맺은 마을 공동체 내에서 운영되는 목공 워크숍에 참여해 가구도 만들고, 다양한 커뮤니티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인생에서 처음 해보는 새로운 일에 도전했다.
그러면서 삶은 점점 자리를 찾아갔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커피를 만들고, 간단히 마을 농장에 들러 그날의 식단에 쓰일 재료를 신중하게 골랐다. 독일 문화에서 유일하게 따뜻한 음식을 차려 먹는 점심은 되도록 한껏 창의성을 발휘한 한 그릇 음식으로 정성스레 준비한다. 어떤 미팅과 스케줄도 이 점심의 시간은 침범하지 않도록 잘 계획했다. 때가 돼서 먹는 것이 아닌, 하루에 가장 중요한 의식 중 하나가 되도록 점심시간을 누렸다. 그렇게 정신과 몸을 천천히 회복해 나갔다.
그 외의 시간은 지속적으로 관심 있는 주제의 웨비나에 참여하기도 하고, 삶의 혁신을 꾀하는 배움에 아낌없이 썼다. 그리고 ‘재미있는 일을 함께해보자’는 친구의 제안으로 베를린 AI스타트업에서 계획하는 얼굴 인식을 활용한 <잃어버린 반려동물 찾아주기 캠페인>을 돕게 되면서는 매주 두 번씩은 프로젝트 미팅에도 참여한다.
하나의 프로덕트를 만들어내는 데 전문가인 그는, 지금 자신의 전 직장에서 갈고닦은 실력으로 스타트업의 ‘사회공헌 프로덕트’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다. 돈 때문도, 자신의 경력 때문도 아니다. 전 직장에서 함께 일을 했을 때 잘 맞았고, 즐겁게 일했던 동료의 제안이었기에 흔쾌히 응했다. 그렇게 단 한 번도 함께 일해보지 않은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100% 원격으로 만나 ‘일’ 그 자체의 의미와 재미를 느끼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렇게 그가 일에 대한 생각을 바꾼 계기는 다임러 시절에 일의 본질을 찾아 헤매다 만난 한 세미나를 통해서였다. ‘도덕적 리더십의 길(The Path of Moral Leadership)’이라는 9주 과정의 세미나를 통해 성공을 재정의했던 것이 그의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되었다.
독일도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이웃보다 큰 차와 집, 남들보다 더 많은 연봉이 성공의 척도였다. 얼마나 짧은 시간에 얼마나 대단한 위치까지 승진하느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마르쿠스에게 더 이상 얼마나 ‘버는가’와 같은 숫자는 자신이 정의하는 성공의 기준이 아니다. 이제는 얼마나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향(positive impact)’을 주는가가 가장 중요해졌다.
나는 그에게 ‘너는 푸른 눈의 수도승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실제로 일과 상당히 밀착되어 있으면서도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는 그의 모습이, 많은 경험을 통해 자신의 일을 인생에 어디쯤 위치시켜 놓을지를 찾은, 깨달음을 얻은 자의 모습 같다.
내 인생에서 내 일은 얼마만큼의 비중일까. 그리고 나는 그 일에 치여서 살고 있을까, 아니면 내 삶의 일부로 생각하고 일을 잘 컨트롤하며 살고 있을까. 갭이어를 고민하는 나에게는 마르쿠스와의 만남은 짧지만 강렬한 메시지를 주었다.
* 이 글은 <원티드>의 [프리워커로 살아남기 시리즈]에 기고하였습니다.
이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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