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듯 떠난 호주에서, 나는 다시 책가방을 메었다
공부를 끝낸 지 어느덧 십 년이 훌쩍 지났다.
다시 책가방을 메고, 필통을 챙기고, 노트를 고르는 일이 이렇게나 설렐 줄 몰랐다.
문구점에서 펜을 고르는 그 짧은 순간조차, 마치 오래 잊고 있던 나의 일부분이 조용히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호주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플랫 화이트를 손에 들고 첫 등교를 하던 날.
유튜브로 수없이 들으며 연습해 온 “Can I get—” 한 문장을 카페에서, 내뱉는데 괜히 배가 간질간질했다.
눈웃음이 예쁜 바리스타가 “No worries!!” 하고 아침을 건네주던 그 순간,
낯선 나라의 하루가 나를 환하게 맞이했다.
AM 07:00 거리에는 이미 하루를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다.
거리에는 이미 조깅하는 사람들, 바람에 흔들리는 양복 자락, 강아지와 함께 산책하는 이웃들. 자유롭게 웃는 얼굴들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 속을 스며들 듯 걷는 내가 어쩐지 낯설어 자꾸만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다
지구반대편 호주의 아침은 AM 4:00에 시작한다. 카페와 상점들도 이미 AM 06:00~07:00 문이 열린다.
그 틈에서 나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혼자’ 서 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이고 , 더없이 짜릿했다.
달링하버를 지나 학원까지, 고작 10분 남짓한 길.
하지만 그 짧은 거리를 걸으며 나는 수십 번이나 놀랐다.
짧지만 그날의 그 길은 오래도록 기억 속에서 확장되었다.
타인의 삶이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풍경 속에서,
나는 마흔 살의 ‘신입생’이라는 이름을 새롭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내가 진짜 여기 있는 게 맞나?’
낯선 소리, 낯선 냄새, 낯선 풍경들 속에서 걷는 나를 바라보는 순간들마다,
마치 새로운 장면들이 이어붙여지는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파란 하늘을 한 컷씩 수집하듯 셔터를 눌렀다. 그 순간마다 걸음은 자연스레 가벼워졌다.
한국에서 아침을 내가 이렇게 맞이 해본적이 있었나?
하루를 이렇게 벅찬 기분으로 상쾌한 걸음걸이 경쾌하게 걸어본적이 있었나?
여러 감정이 오갈때쯤, 드디어 어학원에 도착했다.
오늘은 첫 수업이다.
전날 본 레벨테스트는 전형적인 한국인의 결과를 보여줬다.
문법은 비교적 잘했지만, 말하기는 여전히 서툴렀다.
그렇지만, 이상하게 위축되지는 않았다.
" 그래도 괜찮아. 처음부터 다시 하면 되는 거니까."
나는 오랜만에 ‘학생’이 되었다.
전의 경력, 나이, 역할을 모두 벗고 단지 배우는 사람으로 앉아 있다는 사실이 새삼 낯설었다.
하지만 그 낯섦은 두려움보다 신선함에 가까웠다.
아일랜드 출신 매건샘이 중저음으로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인사를 건넸다.
약간의 긴장과 묘한 설렘이 동시에 밀려오던 자리였다.
한국이었다면 조용히 뒤쪽 자리에 몸을 숨겼을 테지만, 그날만큼은 달랐다.
영어를 제대로 배우고 싶은 마음이 나를 앞으로 밀어붙였고, 나는 맨 앞자리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마흔 살의 첫 등교.
늦지 않았다기보다, 지금이 딱 좋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는 데 필요한 시간만큼
나는 이 낯선 도시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플랫화이트 모닝커피와 함께 시드니의 본격적인 생활이 시작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