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소용돌이, 지구 반대편에서 터져버리다

번아웃은 회사에서 왔지만, 회복은 호주에서 시작됐다

by sso


자유를 갈망했던 걸까.

아니면 너무 늦게 도착한 자유가 마음을 아프게 했던 걸까.


바닷가에 앉아 한참을 울었던 날, 나조차 그 감정의 출처를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주말이 되면 나는 온전히 혼자가 되었다.


워킹비자로 온 친구들은 수업이 끝나면 일하러 갔고,

주말에는 시급이 높아 더 바쁘게 움직였다.


그들 뒤로 남겨진 시간 속에서

나는 갑자기 넓어진 하루와 마주해야 했다.
그들과 달리 내 주말은 고요했다.






좋게 말하면 오롯함이었지만, 끝없이 주어지는 시간 앞에서 밀려드는 두려움도 있었다.
‘나는 얼마나 여기 머물러야 하는 걸까.’
질문은 늘 그 자리에서 나를 붙잡았다.






영어 공부의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보다,
한국에서 받은 상처가 언제쯤 옅어질 수 있을까가 더 중요했다.

다시 덧나지 않게 어루만질 방법이었다.

멀리 떠나지 않으면, 그 기억들이 다시 내 옆에 붙어올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열 시간 비행 끝에 다른 세계로 몸을 옮겼다.




마지막 회사는 외형만 보면 부족함이 없었다. 모난 데 없는 곳이었다.

가깝고, 안정적이고,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중간관리자의 역할을 조용히 해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나는 점점 흐려졌다.

어쩌면 그때 이미 나는 무채색이 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부당함도, 불편함도 ‘괜찮다’고 말하는 사이

내 목소리는 작아졌고, 감정은 색을 잃었다.





하지만 ‘좋은 회사’라는 말이 나를 더 깊이 눌렀다.

조용히 참고, 맞지 않는 방향에도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희미하게 만들어갔다.

유난히 민감하지도, 특별히 정치에 능하지도 않은 나는 어느 순간 흐릿한 회색이 되어 있었다.

마지막 받은 고과의 점수에서, 모든게 무너져 내렸다.

실력보다는, 누가 더 비위를 잘맞추냐의 경쟁

여우 같은 남자들을 이길 방도는 없었다.


힘들때마자, 직장인 카페에 글을썼다.

글의 횟수는 '내가쓴글'에 95개'가 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댓글을 남겨주었다


'오늘 글말고, 다른 글들을 많이 보았어요!

보통은 조금만 버티세요 라고 말하고 싶지만,

지금 마음을 돌보는게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


조금이나마 발버둥 치듯이

심리상담을 주말마다 방문했다.


어느날 상담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왜? 꼭 그회사여만 하나요' ' 진짜 너무나 애쓰셨어요, 지금은 놓아도 되요'


왜 그 회사야만 했을까?

입사초 생각해보니


30대 후반이였고,

분야도 바꾸고, 누구나 안될꺼같은 회사에

스스로 믿고, 지원해서 스스로 이뤄낸 내 작은 성취였다.

고작 그거였다. 그래서 더 놓지 못하는 애증의 회사 였다


단지 그이유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



점심시간이면 휴게실에 누워 눈을 감곤 했다.

잠이 오지 않아도 가만히 누워있는 일이 습관이 되었다
피곤해서가 아니라, 어디에서도 나를 놓을 수 없었던 무력감 때문이었다.

그때가 내 마음의 바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조용한 어둠 속에서

나는 서서히 스스로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호주에서의 고요함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회사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따뜻함을 어학원 친구들에게서 느끼게 되었고,
언어도, 문화도, 배경도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며

외로움보다 ‘살아있다’는 감각이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나는 오랜만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순간들을 만났다.


주말이면 해변에 누워 하늘을 찍고, 공원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미술관에서 작품앞에 오래 서 있었다.
그 시간들은 외로움 대신 자유를 채웠다.

묘하게 위안이 되는 시간이었다


혼자여도 괜찮았고, 혼자라서 더 온전히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햇빛이 강하게 내리던 바닷가에서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늦게 찾아온 자유 때문이었을까,

한국에서의 어둠늬 그림자가 불쑥 떠올라서였을까,

아니면 처음으로 ‘지금의 나’를 마주하게 되어서였을까.



그 눈물 속에는 과거도 있었고, 현재도 있었다.



파도 소리 속에서 감정이 천천히 소용돌이쳤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알았다.

그때의 나는 이미 사라지고,

지금의 나만이 조용히 남아 있다는 것을.




지구 반대편에서 터져버린 감정의 소용돌이 덕분에
나는 비로소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나로 돌아오는 방법을 배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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