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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krsnrn Mar 18. 2020

쉽게 로망틱해지기

낭만 빼면 시체인 파리를 기억하는 방법



오랜만에 아침에 나가 혼자 동네산책을 했다. 자주 걷던 아스팔트길을 따라걷다가 돌아올땐 인적이 드문 냇가로 내려가 도서관 방향 쪽으로 돌아왔다. 올해 초에는 여행 준비다 뭐다 하다가 2월 중순이 되서야 한국으로 돌아왔고, 동네에 도착하고서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트 외에는 외출을 자제했으니. 올해 이 길을 걸은건 처음이었을 거다. 



2주간 몸에 이상이 없어도 나가질 않다가 나가야겠다 마음을 먹은건. 창너머의 아직 앙상한 가지로 흔들리 있는 나무들이 서있는 바깥의 공기가 어땠는지 기억나질 않았기때문이다.




2020년 3월 4일  9:19



아침 일찍 밖으로 나가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2주정도 지나니까 시차적응도 얼추 되서,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8시 반쯤 눈이 떠졌다. 간단하게 외투를 걸치고 집을 나왔다. 산책로로 향하는 길 곳곳의 낯선 것들은 내가 이곳에 없던 한달이라는 시간을 떠올리게 했다. 한달이 그렇게 짧지만은 않은 시간이구나 생각했다.




작은 강가에 도착하니 거실 창 너머로만 보던 바람이 제법 세게 나를 가르고 지나갔다. 맞아 이 감촉이었다. 마스크를 맞대고 닿아있는 공기가 아직은 시원했다. 귀가 시린 감촉이 나쁘지 않았지만 왠지 낯설어 외투의 모자를 덮어썼다. 문득 내 오른쪽으로 보이는 풍경이 센강과 퍽 닮았다고 생각했다. 오고가는 사람들을 꽤나 마주쳤고, 걸음은 계속 센강에서의 기억을 떠올리게했다. 




센강 변두리에 있던 카페에서 잠시 나와 기지개를 펴고 강을 따라 잠시 걸었던 기억. 걷고 뛰는 사람들을 배경삼아 조명이 켜진 밤하늘을 비추는 센강을 따라 뛰었던 기억. 출근길의 사람들 사이로 걸어간 산책길의 끝에서 아침의 센강을 만끽한 기억. 강물이 찰박거리던 아랫길을 따라 루브르에서 엉발라드까지 걸었던 기억. 노을진 하늘을 비추는 강의 수면과 에펠이 함께 보이는 풍경에 강을 건너는 사람들과 함께 다리 위에 멈춰있던 기억. 눈 앞의 풍경을 보고 센강을 떠올리자 이 작은 강과 센강이 약속이라도 한 듯 내 머릿속에 추억 보따리를 마음대로 풀어놓았다. 그러느라 오랜만에 보는 동네의 풍경과 공기를 소홀히해버렸다.



2020년 2월 6일  9:22


문득 지난 한달간의 경험에 있어서, 스스로에게 감사했다. 감사할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던 시간이지만(나의 1년을 곁에서 믿어준 가족, 한달이라는 시간동안 나와 함께 산 친구들, 이 모든 시간을 허락해주신 하나님), 새로운 시선을 얻은 시간들에게 스스로가 용기를 내준 것이 시작점 언저리에 있더라.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나의 앞으로의 길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터라 더욱 나에 대한 감사함이 절실했던것 같기도 하다. 걸음을 계속하며, 나는 나에 대한 고마움과 동시에 앞으로의 곳곳에서 파리를 발견할 수 있겠다는 설렘을 느꼈다. 




어쩌면 이 설렘의 공은 시간에게 돌려야 할지도 모른다. 같은 길도 기분에 따라. 그리고 함께 걷는 사람이 달라질 때마다 또 다른 길이 펼쳐지곤 하는데, 10년 넘게 알고 지낸 이 동네 산책길에 설렘을 느낀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으니 말이다. 좀 더 시간을 묵혀둔채로 이곳 저곳에서 새로움을 느낄 요소들을 경험하면, 이 작은 길에서도 느낄 설렘이 마를 일 없겠구나 생각했다.





2020년 1월 23일  18:00



오랫동안 '자기 위주적이다, 이기적이다, 나 밖에 모른다, 내 기분 내킬때만 한다.' 이런 말들로 스스로를 열심히 괴롭혀왔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으려 한다. 유독 그런식으로 나를 대한 이유는 사회생활에서의 내 모습과 혼자있을때 내 모습이 서로 상충된다고 느낀 것이 크다. 나는 주로 '감정적인' 상태에 놓여있고 쉽게 기분이 변하는 때가 많은데, 동시에 이것을 타인에게 말하고 표현하기를 어려워한다. '유난', '오버'한다는 말을 들을까봐. 그것이 두려워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나는 프랑스에서 많은 격려를 받고 왔다.



사실 프랑스를 다녀오면 한국에서와는 달리, 내가 의욕적이고 좀 더 적극적으로 변하겠지?라는 기대를 조금 했었다. 내가 나를 너무 아낀 느낌이랄지. 프랑스에서는 나를 좀 더 쓰는 법을 배우고 오고싶었다. 다녀온지 한달정도 흐른 지금의 나를 보고 있으면 '전보다 적극적으로 변했나?' 싶은 전과 비슷한 모습들을 마주하기도 하지만 '근데 그 전의 모습이 어땠더라?'하며 그 비교의 초상이 흐려지기도 한다. 아직 시간이 많이 흐르지 않은 탓에 그것들을 증명하고 확인할 기회와 마주치지 못한 것 때문도 있지만, 애초에 변했고 변했지않고, 기대를 충족하고 그렇지 못함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포인트인 것 같다고 한국이 아닌 타지에서 배우고 온 것같다.





'나를 괴롭혀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다시 '나'를 괴롭힐 이유는 충분하니까, 이제는 '그만큼 열심히 나를 생각해왔던 거겠지.' 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여전히 나는 내 기분이 소중하니까. 내가 느끼는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것이 내가 이 세상에서 이 삶을 살고 있는 이유라고 느껴지기도 하니까. 나는 앞으로도 열심히. 쉽게 낭만스러워지는 사람으로 살아갈거다.



앞으로도 잘부탁한다 나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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