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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지성 Aug 03. 2022

50에 결혼할 수밖에 없는 이유 3

중년 결혼예찬론자가 되기까지 마지막 여정

나는 44살에 대학에 자리를 잡은 후 진정으로 결혼을 하고 싶었다. 

이제 좋은 남자 만나 사랑을 하고 가정을 꾸리면 비로소 비어있는 행복의 반절이 채워지리라 생각했다. 자아실현을 위해 열심히 달려와 성취했듯이 결혼도 맘만 먹으면 그리 어렵지 않게 할수 있는 것인줄 알았다


"짧은 흑역사로 남은 중년의 소개팅"


그러나 현실은 싱글 남성을 만날 기회조차 별로 없는, 사막과도 같은 것이었다. 내가 산업체가 별로 없는 전주라는 중소도시에 살아서 더 그런 것일수 있는데, 고학력의 40대 중반 여성에게는 소개팅의 기회조차 별로 없었고 그나마 나간 소개팅 자리에서는 번번이 뭔가 조화되기 어려운 중년 남녀가 부자연스럽게 앉아서 무미건조한 이야기 몇마디를 나누다 멋쩍게 돌아가는듯한 풍경이 연출되곤 했다. 인연이 되려면 일단 연애에 대한 기대를 안고 나와야 할텐데, 내가 만난 중년 소개팅남들은 만나자마자 이런 비싼 곳에서 소개팅을 처음 해본다고 볼멘 소리를 하거나, 내가 도착했을때 이미 커피숍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거나,  자기가 낼수 있는 시간이 딱 한시간밖에 없다며 자기 일하는 직장 앞에서 그 시간에 만나자고 하거나, 혹은 원래 직장동료가 나와야 하는데 나가기 싫다고 해서 자기가 대타로 나왔다고 하거나... 하는 식으로 소개팅에 성의가 없었다. 마지막 대타를 제외하곤 나랑 나이가 비슷한 미혼들이었다. 한시간 짜리 조건만남 제안남은 정말 어이도 없고 굴욕적이라는 느낌마저 들어 만남 자체가 성사되지 않았고, 다른 세 사람을 만난 건데 상황이 이러고보니  ‘내가 왜 이런 모르는 아저씨하고 여기에 나와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색하고 씁쓸한 시간들이었다.   

 

"매너 없는 미혼남들에 자존심만 상하는 중년 소개팅"

      

이런 상황은 나만 경험했던 것은 아닌듯 했다. 대학에는 공부하느라 혼기를 놓친 중년 싱글녀들이 적잖이 있는데, 당시에 나 정도의 최악의 케이스는 아니더라도 대부분 미혼남들의 무성의함, 무례함에 상처받은 소개팅 에피소드가 빈번한 수다거리였다. 직업이나 외적 조건이 나쁘지 않은데도 미혼상태로 소개팅에 나오는 미혼남들은 이렇게 여성과 잘 해볼 의지도, 매너도 없는 것이 일반적인듯 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남성이 자신보다 어린 여성과 맞선을 보는 문화가 팽배한데다 직업이 좀 괜찮은 중년 남성은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젊은 여성들과도 중매가 들어오기 때문에 나처럼 또래의 중년여성이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아 더 그랬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건 비단 나만의 피해망상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자존감만 낮아지는 소개팅이 몇번 있은 후 나는 깨달았다. 이런 식으로는 결혼을 하지 못하겠구나 하는 것을...  

    

당시 마지막 소개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소개팅을 열심히 주선하던 친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다시는 소개팅이나 선을 보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다. 당시 언니가 전화 너머로 “에휴~ 내 동생이 어때서...” 하며 탄식을 하는데, 마치 남성들에게 선택받지 못하는 동생의 처지를 속상해하는 듯해서 그게 더 상처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내 중년 소개팅 역사는 막을 내리는듯 했다.

   

"결혼을 포기하고 난후 들이닥친 극심한 우울감"     


렇게 일천한 소개팅의 역사가 마무리되고 나는 한동안 깊은 우울감에 시달려야 했다. 열심히 살아서 여기까지 왔건만 결국 혼자 살아야 한다는 현실과의 맞닥트림은 정말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서른여섯살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어 홀로 미국행을 감행한 것도, 절대고독의 경지를 체험하면서까지 외로움과의 사투를 벌이며 견뎌낸 것도, 돌아와서는 외롭지 않게 살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당히 자아실현을 해서 돌아와 가족들과, 그리고 누군가와 가족을 이뤄 함께 살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기에 버틴 것이지, 결혼 대신 직업을 선택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직업과 결혼은 보완적인 것이 아니다. 직업은 생존과 자아실현을 위해 필요한 것이고, 결혼은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를 충족하는데 필요하기에 그 용도가 다르다. 자아실현이 됐다고, 먹고 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고 행복이 자동으로 뒤따라 오는건 아니듯이 원하던 직업을 얻었다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혼자 행복하게 살기위해 행복학에 길을 묻다"  

   

나는 진정으로 행복해지고 싶었다. 둘이 될 운명이 아니라면 혼자서라도... 정말 행복해지고 싶었다. 이렇게 우울하게 살려고 그렇게 바둥거리며 살아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구도자의 길을 가듯 열심히 읽었던 행복학 서적들은 내게 행복의 길을 당황스런 방향으로 알려주었다. 


행복은 혼자서는 성취될 수 없고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 해야 가능한 것인데, 그게 배우자나 연인이 가장 파워풀한 존재임에는 분명한 것이었다. 혼자서도 행복한 길을 찾기 위해 읽었던 행복학 서적에서 사실상 둘이어야 행복해진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얼마나 당황스런 일이던지... 부끄럽지만 나는 그때까지도 지식을 쌓고 성찰하여 깨달으면 혼자서도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열심히 살자고 다짐한다고, 혼자서 성찰하고 노력한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행복회로가 비로소 반짝반짝 켜진다는게 행복의 원리였다. 한마디로 대단한 이론이나 관념이 필요 없이 행복의 비밀은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을 때 퐁퐁퐁 솟아난다데에 있었다.         


"행복은 결국 사람과 함께 할때 온다"


행복의 진실을 알게 되었어도 나는 이후 특별하게 '사람'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하지는 않았다. 귀찮기도 하였고, 무엇보다 나처럼 예민한 가방끈 긴 유형에게는 가뜩이나 낮은 중년의 소개팅 성공 가능성이 거의 희박한 수준일 것이라고 예단하면서 '여우와 신포도'처럼 내 게으름을 합리화하며 살았다. 이후 어정쩡하고 욕구불만만을 안겨주었던 썸 같은 연애가 한차례 지나가고 평생 홀로 사는 삶을 받아들였다가 지금의 남편을 만난 것이다. 


나는 지금 행복학의 결과들이 맞음을 몸소 체험하고 있다. 역시 행복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알콩달콩한 경험속에서 부지불식간에 느껴지는 경험임을 확신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맺는 안정적인 관계는 결코 혼자서는 경험할수 없는 행복 감정을 선사한다. 나는 이렇게 중년 결혼 예찬론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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