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수저의 흑역사 직장생활
"내가 터득한 대기만성의 현실 의미"
언젠가 친구가 '너는 대기만성인것 같아' 하고 불쑥 얘기한 적이 있다. 그런가? 내가 대기만성인가 하고 곰곰히 생각해 보다가 나는 대기만성이라는 말은 가난한 집 출신들에게 있어 성공의 어려움을 내포하는 말이면서 성공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는, 일종의 마약같은 고사성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면 성공하기도 쉽지 않지만 성공을 하기까지 오래 걸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극히 일부의 성공 케이스는 대기만성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누구나 빨리 성공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고 싶지만 태어난 조건이 좋지 않으면 그 길을 찾아가는데 오랜 시간을 돌아 돌아 가야 하는 것이 현실세계의 이치였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다는 진리를 터득한 첫 직장"
나는 다행히 돈이 안드는 지방 국립대에 진학해 남들보다 조금 빠른 4학년 2학기가 되기 전에 의료보험조합에 공채로 입사했다. 언뜻 보면 정말 운이 좋은 케이스였는데 이 '첫 운' 이후 내 직업운은 10년 이상 좋지 않았다. 앞서 잠시 언급했듯 나는 다양한 직업을 거쳤는데, 그 첫 직장이 지금의 건강보험공단 전신인 지역의 의료보험조합이었다. 대학 4학년때 연습삼아 보았던 시험에서 덜컥 합격하여 여름방학부터 출근하기 시작했다. 입사하자마자 나는 저소득 외곽지역 주민센터에 파견나가 지역의료보험의 잠재적 대상자들에게 전국민 의무 의료보험비를 강제 징수하는 일을 주로 담당하게 되었다. 지금은 매달 의료보험료를 내야 하는 것을 모든 국민들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91년 당시는 제도의 초기단계여서 일부의 사람들에게는 병원에 가지도 않는데 매달 돈을 내야만 한다는 것이 납득되지 않는 시기였다. 나는 특히 그런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도시 외곽지역에 발령을 받아 허구헌날 민원인들에게 일방적으로 혼나다가, 같이 싸우다가를 반복하게 되었다. 대학도 졸업하기 전에, 그것도 첫 시험에서 합격해 입사한 탓에 민원인들을 상대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탓도 컸지만, 내가 발령받은 곳은 실제 험지로 치부된 곳이기도 했다. 막 입사한 어린 여성직원을 배려하기 위해 보다 쉬운 곳에 배치한다는 것이 인사담당자의 착각으로 반대의 결과가 빚어진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으니, 입사시 운은 좋았으나 그 운은 실제 좋은 운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다'는 삶의 진실을 뼈져리게 체험한 첫 직장이었다. 결국 남들이 부러워하던 직장을 고작 1년 7개월만에 그만두고 말았고, 더욱이 그만두기 몇달 전부터 주경야독으로 독서실에서 열심히 준비하던 공무원 시험에서는 보기 좋게 낙방했다. 이후 나는 먹고 살 일을 걱정하며 몇달을 지내야 했다. 그렇게 좌표를 잃고 방황하다 우연찮게 지방일간지 수습기자 모집 공고를 본 언니의 제안으로 지방 신문사에 입사했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기회조차 없었던 두번째 직장생활"
신문사 시절 역시 흑역사의 연장이었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변변한 능력 발휘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채 5년간을 한직만을 전전했다. 지금은 언론사에 여성 간부들이나 누구나 선호하는 정치부 같은 곳에 여기자들이 진출하는 시대이지만 그때는 아직 차별금지나 성폭력특별법 같은 여성보호 관련 법규들이 전무했던 90년대 중반이었으니 남성으로 가득찼던 지방 신문사에서 평범한 여성인 내게 좋은 부서가 주어질리 만무했다. 취재부서에는 나 혼자 여성이거나 나 아닌 여성 한명 정도가 잠시 근무하다 사라지곤 하던 분위기였다. 나는 항상 문화부, 그것도 주로 여성(생활)부 파트를 거의 전담했다. 여성부는 여성이 당연 담당해야 하는 금남의 파트여서 전혀 경쟁적이지 않은 파트였고 그마저도 낙하산으로 여성후배가 등장하면 은근 내근 근무로의 밀려남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곤 했다. 당시 남성들은 처음부터 사회부에 배치받는게 일반적이었고, 문화부에 일부 배치됐어도 몇 년 안돼 사회부나 경제부, 정치부로 모두 옮기는 식이었다.
"밀레니엄에 빚만 있는 백수가 되다"
나는 자라면서도 유독 남아선호사상이 극심했던 엄마탓에 항상 여성으로 받는 불이익이 한처럼 남아있던 사람이었는데 두번째 직장은 대표적인 남성위주의 직장에 들어간 것이다. 시시때때로 울분을 삭히며 사표낼 시기만을 모색하며 버티던 신문사 기자생활은 2000년 밀레니엄의 도래와 함께 내 나이 30살의 문턱을 넘으면서 막을 내렸다. 당시 내 수중에는 돌려막다가 못갚고 있는 신용카드빚 70만원과 막 할부가 끝난 티코 한대가 전부였다. 한마디로 돈 한푼 없이 무대책한 상태의 싱글로서 30대를 맞았던 것이다.
"돈없어 결혼은 꿈도 못꾸던 시절"
주위에 친구들은 대부분 결혼을 한 상태였다. 사귀는 남자가 없었던 친구들도 20대 후반 서둘러 선시장에 나가 선을 몇 번 보고 30이 되기 전에 결혼을 했다. 당시에는 흔한 풍경이었다. 나는 내 직장생활도 이렇듯 엉망이 된 상태였고 혼수를 해줄 형편이 안됐던 집안 형편 탓에 선시장 진입은 꿈도 못꾼채 결혼은 저멀리 멀어지게 되었다.
"미국유학을 꿈꾸다 영어에 발목 잡히다"
그렇게 30대를 맞은 나는 이후 대학의 한 연구센터에서 비정규직 행정일을 하며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이 기간이 밀알이 되어 내친김에 미국 유학까지 맘먹는, 대전환의 시기를 맞았다. 미국의 좋은 대학 박사과정은 학비 면제와 혼자 살기에 그리 부족하지는 않은 생활비까지 지원해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당시 3년여 기간동안 모은 돈과 퇴직금을 합해 3천만원 정도가 수중에 있었는데 이 돈을 종잣돈 삼아 미국 박사유학을 준비했다. 들어가기만 하면 돈이 해결되니까 ‘앞으로 인생은 모 아니면 도’라는 심정으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겁 없이 유학준비를 시작한건데, 내가 크게 간과했던 부분은 내가 심하게 영어를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정말 나는 영어실력이 형편없었다. 사실 지금도 유학파 치고는 영어를 못하는 편인데, 당시에 나는 말하기는 커녕 듣기, 쓰기도 전혀 안될 뿐더러 기억하고 있는 영단어도 몇 개 안되는 수준이었다. 단순 문법위주 교육을 받다 영어공부가 중단된지 오래 지났던터라 정말로 영어가 난관이었다. 미국 박사과정에 진학하려면 비영어권 국가 출신이기에 치러야 하는 토플과 일반 대학원 입학 수능시험인 GRE에서 높은 성적을 내야 하는데 나는 당시 거의 영어문맹에 가까운 실력이었던 것이다.
얼마 안되는 모아둔 돈을 가지고 강남의 어학원 옆 고시원에 들어가 낮에는 어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돌아와 고시원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세월이 이어졌다. 6개월간의 고시원 생활이 지났을 무렵에도 필요한 성적은 커녕 원서를 내기엔 말도 안되는 점수에서 고전하고 있었다. 그렇게 영어의 난관에 부딪혀 헤매던 시기 구원처럼 대학원 은사님으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미국 엘에이에 있는 노인복지시설에서 직원을 뽑는데 현지의 구인난으로 인해 한국에서 데려오고 싶어한다며, 나를 추천해주시겠다고 했다. 이후 취업비자가 거부되어 재도전하는 우여곡절 끝에 난 결국 로스엔젤레스 인근의 노인복지시설에 입사했고 유학준비를 잠시 중단한채 일을 하게 되었다.
"라라랜드, 좌절 속에서 버텨낸 시간들"
LA에서의 직장생활은 형편없는 영어실력 때문에 기본적으로 늘 긴장과 주눅의 연속이었다. 다행히 내가 맡은 이용자가 한국에서 이민 온 영어 못하는 노인들 위주여서 그럭저럭 눈치로 버티며 일을 했다. 일을 하며 역시 주경야독으로 밤에는 동네 도서관에 가서 시험 준비를 하는 날이 계속되었다. 미국에서 산다고 영어점수가 쉽게 오르진 않았다. 토플과 쥐알이 두개의 시험을 10번 이상 본듯 하다. 시험을 보러 엘에이 인근 토플센터로 한시간씩 운전을 해서 가곤 했는데, 시험을 마친 직후 컴퓨터에 뜬 점수를 확인할 때마다 느낀 좌절감은 상당했다. 그 날도 역시 안나온 점수에 좌절하며 닭똥같은 눈물을 떨구며 라라랜드의 굽이친 고속도로를 운전하며 돌아오던 길, 낭떠러지 추락을 방지하기 위해 높게 세워둔 흰색의 가벽에 얼마나 가서 박아버리고 싶었는지.... 그냥 당장 사라져버리고 싶을 정도로 한없이 내 자신이 초라해지는 것을 경험하고, 또 경험한 시절이었다.
그렇게 열번 이상의 눈물 어린 영어시험 분투기를 견디고 마침내 웬만한 유수의 대학에 원서를 넣어볼수 있는 점수가 나왔다. 입학하는 박사과정생에게 전액 수업료 면제와 거의 전액 생활비 보조를 지원하는, 미국의 상위 20위권내 사회복지 대학원 과정 중 10곳에 원서를 넣었고 그 중 7개의 대학으로부터 합격통보를 받았다. 그렇게 장학금 덕에 크게 돈걱정 없이 무사히 공부를 마쳤고, 꿈에도 그리던 고국으로 7년만에 돌아올수 있었다. 유학을 마음 먹은 후 유학준비를 한 기간과 취업비자를 기다리던 시간, 미국생활 7년, 그리고 돌아와 임용된 기간까지 무려 10년이 걸렸다.
"결혼을 실기했음을 깨닫다"
그렇게 나는 44살에야 비로소 원하던, 존중받는 직장을 가질 수 있었다. 40대 중반이 되어서야 꿈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와 마침내 비어있는 내 삶의 행복의 반절을 채우고 싶어졌다. 그것은 사랑을 하고 그 사람과 가정을 꾸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몇 번의 소개팅을 한 후 내가 깨닫게 된 건 결혼을 하기엔 너무 늦어버렸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