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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지성 Jul 29. 2022

흙수저가 50에 결혼할 수밖에 없는 이유 - 1

개천에서 용나기도, 결혼하기도 어렵다

나는 50에 결혼했다나름 특이하다면 특이한 경우인데 생각해보면 내가 결혼을 늦게 한 것도시간을 거스르며 동년배들보다 다소 늦은 인생을 살아온 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소위 말하는 흙수저 출신이라는 것에서 그 근본적 원인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종종 해본다     


"다양한 직업, 생존공부의 수레바퀴에서"


나는 92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의료보험조합지방지 기자대학 직원 등 3개의 전혀 다른 직장을 전전하다가 33세에 전공을 바꿔 석사과정에 진학했고그후 미국으로 건너가 사회복지사 생활을 하다 무려 39살이 되어서야 미국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4년의 과정을 마치고 44세에 지금의 대학에 임용된 후 정말 길고 길었던 자아실현의 여정이 일단락되었다


지금이야 석박사 과정이 평생교육 과정처럼 자리를 잡다시피 할 정도로 직장을 병행하며 적지않은 나이에 대학원에 진학학는 사람이 많아졌는데당시에는 대학원 진학자들도 소수였고무엇보다 대학을 졸업하고 석사와 박사를 연이어 하는게 일반적인 루트였던 시대라 나는 매우 특이한 늦깎이 학생이었다한마디로 43살까지의 내 청춘시절은 직장을 옮기느라 공부하고, 대학원 공부하느라 또 공부하던... 온통 '생존 공부'의 수레바퀴에서 허덕이던 시간들이었다평생동안 얼마나 많은 시험을 보았는지... 지금도 시험이라면 넌덜머리가 난다.       


"평생 갈비뼈에 총알을 박고 사신 할아버지뻘의 아버지"


나도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지만 우리 부모님의 인생역정을 생각하면 나는 정말 평범한 축에 속한다

우리 부모님은 두분다 재혼으로 가정을 이루어 딸 둘에 아들 한명 삼남매를 낳아 어렵게 기르셨다. 십년전에 작고한 아버지는 미수복 강원도지역 출신으로서 북한에 아내와 어린 자식 셋을 두고 625전쟁에 참전했다 총상을 입고 붙잡힌 케이스로서적잖은 수감생활 끝에 사상 전향을 하고 남한의 품에 안겼다내가 이십대 후반 즈음에 병원에서 아버지의 엑스레이를 찍은 적이 있었는데갈비뼈 안에 선명하게 박혀있는 총알을 보고 의사선생님이 깜짝 놀라 이게 뭐예요 총알 아니예요?’ 하셨고 아버지는 총알 한발이 제거되지 못하고 있었네요’ 하며 껄껄 웃으셨던 기억이 지금도 선하다


그렇게 아빠는 혈혈단신 전주에 정착해 이 일 저 일을 전전하며 살다가 무려 16세나 나이가 어린 우리 엄마와 재혼하신 것이다때문에 자식을 매우 늦게 가지게 된 건데 둘째인 나를 48세에막내인 남동생을 무려 54세에 낳으셨을 정도로 연세가 많으셨다당시로서는 동년배들의 아버지에 비해 할아버지뻘 되는 나이였기 때문에 아버지는 한번도 자식들 운동회며 졸업식에조차 와보신 적이 없었다아버지 스스로도 자식들이 창피할까봐 안오셨고 철없던 우리 형제들도 조용히 그런 사실을 받아들였던 듯하다아버지는 더욱이 공산주의로 물들었던 북한지역 출신이어서 오랜 동안 국정원의 전신인 당시 안기부의 감시를 받으며 사셨다안기부 직원이 가끔 동향 파악인지 감시인지 하러 집에 오곤 했는데가게 딸린 단칸방에 살았던 우리 가족은 그 시간동안 방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어야 했다반공교육을 받은 세대인 나는 나이도 많고 그런 사상 감시를 받는 아버지가 어린 시절 사실 콤플렉스였다.     


"가난이 주는 자의식으로 꿈틀대던 사춘기시절"


지금은 너무도 그리운 우리 아버지는 우리 삼남매에게 항시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격언을 마치 신념처럼 강조하셨다연좌제가 있었던 당시에 당신의 자녀들이 아무리 잘 나도 아버지 이력 때문에 진로가 막힐 것을 예상해 미리 싹부터 잘라놓으시려고 그러셨던 것이다때문에 자식들이 공부 잘 하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셨고 항상 중간만 하라고 타이르셨다어린 시절 이념이나 역사에 대해 전혀 몰랐던 나는 그런 아버지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다른 집은 상을 받아 가면 칭찬해 주는데 우리 집은 아무리 상을 받고 공부를 잘 해도 환영받지 못했다당연히 집에는 동화책 한권이 없었고 참고서는 늘 중고서점에서 구입해 사용해서 신간과 맞지 않는 문제들이 종종 있었다때문에 한창 사춘기시절을 보냈던 고등학교 시절은 학교에 가기 조차도 싫었다그 시절 학생들이 돌아가며 문제를 읽고 푸는 식의 수동적 수업방식이 많았는데중고책이어서 번호가 안맞기 일쑤인 문제지를 옆 짝꿍 것과 비교해 확인하느라 수업시간엔 늘 긴장했고자연히 늘 주눅들어 있었다. 자의식이라도 좀 약했으면 훨씬 살기 편했으련만, 나는 안타깝게도 자의식이 너무 강한 아이였다. 특히 나는 유독 아들과 딸을 심하게 차별했던 엄마 탓에 엄마와의 불화가 한창 심했던 터라 늘 집에도 가기 싫고학교에도 가기 싫어 매일 거리를 배회하며 그 중요했던 학창시절을 낭비하며 보냈다     


"매맞던 결혼을 피해 북한출신 나이많은 남자와 재혼한 어머니"


어머니 역시 신산스런 삶을 살다 아버지와 두 번째 가정을 일구신 케이스이다당시로서는 나쁘지 않은 집안의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으나 안타깝게도 우리 엄마가 겨우 여섯살때 엄마의 어머니즉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한다외할아버지는 곧 재혼해서 배다른 자식 둘을 연이어 낳으셨기에 엄마는 결혼한 큰 오빠집에서 조카들 뒤치닥 처리하며 더부살이를 하느라 초등학교도 채 마치지 못하셨다그렇게 가정부 아닌 가정부로 살다 중매로 얼굴도 안보고 시집을 간 건데 하늘이 무심하게도 신랑이 정신이상자였다고 한다결혼 후 3년 정도가 흘렀을 무렵 시집간 여동생이 잘 살고 있는지 잠시 동생네 집을 찾았던 외삼촌이 정신 나간 남편으로부터 두들겨 맞고 있는 여동생을 목격하고 그 자리에서 데리고 나오면서 자동적으로 이혼의 수순을 밟았다고 한다그렇게 잠시 오빠집에서 이혼녀로 지내다 또 아버지의 나이를 열살 가까이나 속인 중매쟁이의 농간에 넘어가 16살이나 나이도 많고 가진 것 하나 없었던 북한출신의 혈혈단신 아버지랑 재혼을 하셨다지금 생각해도 정말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매우 특이한 인생역정을 가진 부모님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흙수저 중에서도 정말 흙수저 가정에서 자란 탓에 나는 항상 시간이 더디게 흐름을 한탄하곤 했었다빨리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되어 자립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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