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결혼일기
같이 사는 부부가 삶의 지향이나 가치가 같은 것은 너무 중요하다.
특히 중년엔 더욱 그런 것 같다. 그냥 아이들의 아빠, 엄마로서만 공존하는 중년부부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실감하는데, 이는 여러가지 사연이야 있겠지만 삶의 지향이 다른 것이 그 원인 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5년전 우리의 연애시절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나는 남편과 삶의 지향을 빨리 공유하고 서로 동의한 것이 불필요한 소모를 최소화하고 결혼 확신을 앞당기는데 주효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삶의 지향을 공유했다는 것은 행복하게 사는 길에 대한 의미와 방식에 동의하고 그것을 같이 실천하는데 동의했다는 것을 말한다.
나는 국내외를 오가며 오랜 독신생활을 하면서 전혀 행복하지 않은 현실에 대한 타개책으로 행복학, 긍정심리학을 탐독했었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찾았던 행복의 진실이 다름 아닌, (꼭 결혼의 형태는 아니더라도) 둘이어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난후 나는 책 읽은 것을 후회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때 알게 된 행복 지식은 남편을 만나면서 전혀 다른 국면을 맞게 됐는데, 일종의 행복학의 실전 응용편의 형태로 내 삶에 적용되었던 것이다.
당시 내가 읽었던 수십편의 행복학 서적 중에 지금도 인상 깊게 남은 것은 사실 두권인데, 그것은 버트런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과 서은국의 ‘행복의 기원’이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위대한 문필가이면서 현대판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닐까 할 정도로 다방면에서 두루 영향력있는 저작들을 출간한 러셀은 무려 1930년에 펴낸 이 에세이에서 지금 현대 상황에서 읽어도 딱 맞을 현대인의 행복에의 길을 제시해준다. 그는 현대인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심리학적,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면서 행복에 이르는 길을 개인 내적, 인간 관계적 차원에서 제시했다. 당시 읽으면서 뭔가 삶의 방향이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행복의 정복'이 사유하며 얻는 행복에 도움이 됐다면 서은국교수의 '행복의 기원'은 실천하는데 명쾌한 도움을 주는 책이다. 이 책은 진화심리학적 입장에서 다양한 심리학적 행복 실험의 결과들을 제시하며 오컴의 날로 베듯 행복을 단순명료하게 정의한다. 한마디로 행복은 거창한 관념이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경험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책 후반부에 실린 사랑하는 남녀가 맛있는 음식과 와인 한잔을 나누며 활짝 웃고 있는 한 장의 사진이 바로 행복이라는 것의 실체라고 제시한 이 책은 뭔가 뒷통수를 탁 맞은 듯한 울림을 주었다. 당시 나는 혼자서도 지식을 쌓고 성찰하면 행복해질수도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었는데 그 기대가 무참히 무너진 대신 뭔가 선명한 행복에의 길을 발견한 것도 같았다.
“왜 사람이 행복에 그토록 중요할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찾도록 하기 위해 뇌는 설계되었다. 그것은 생존과 직결되는 ‘사람’이다. 그래서 뇌는 사람이라는 생존 필수품과 대화하고 손잡고 사랑할 때 쾌감이라는 전구를 켜도록 설계된 것이다... 행복은 타인과 교류할 때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일종의 부산물이라고 볼수도 있다. 물론 그것은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때다. 가장 빈곤한 인생은 곁에 사람이 없는 인생이다. 그의 겨울은 유난히 춥고 베인 상처도 잘 아물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행복하기 어렵다는 점이다(서은국 <행복의 기원> 150p).
나는 남편과 사귄지 얼마 안됐을 무렵 이 '행복의 기원'을 선물해주면서 꼭 정독한 후 나와 이야기 나눌 것을 정중하게 요청했었다. 남편이 이 책에서 말하는 행복에 동의하는지, 나와 함께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인지 남편의 사유능력과 가치관을 확인하고 싶었다. 남편은 사업하는 사람이라 사람을 만나 딜을 하고 조율하는 업무가 주는 피로감을 사우나와 '나는 자연인이다' 류의 중년남자 대리만족 프로그램 시청으로 푸는 스타일이어서 막 사귀게 된 연인의 독후감 요청이 처음엔 당황스러웠다고 한다. 이후 2주 정도 지났을 무렵 남편은 이 책의 행복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그렇게 소소한 행복을 찾으며 살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 후 우리가 동의한 행복을 실천하고 있다. 실천은 별게 아니고, 틈나는대로 맛집을 찾아다니며 맛난 음식을 함께 하는 것을 즐기고, 자주 여행을 다니고, 언니네나 친구부부와 자주 만나서 같이 좋은 시간을 갖는 것이다. 아이스크림처럼 빨리 녹는 행복의 정체를 알았기에 우린 자주 행복할 일을 만드는 것에 열심인 것이다. 그렇게 5년 동안 우린 녹을만 하면 다시 채워지는 행복을 체험하며 살고 있다.
행복한 삶, 그것은 알고 보니 어렵고도 '참 쉬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