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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지성 Dec 27. 2022

재혼은 처음이라...

남편의 재혼 적응에 대한 아내의 전지적 시점

남편은 전혀 징후조차 없던 이별로 인해 갑자기 솔로가 된 후 나와 재혼을 한 사람이다. 신기한 것은 내 주위엔 이혼한 사람은 몇명 있지만 사별한 경우는 없는 반면, 마당발인 남편 주위에는 그 흔한 이혼 커플이 단 한 커플도 없고 아내를 잃은 사별한 친구들이 4명이나 있다는 것이다. 남편 나이가 59세라는, 적잖은 나이임을 감안하더라도 여성의 평균 수명이 87세인 요즘 현실에서 다소 특이하다면 특이한 일이기도 하다.        


남편은 애도기간을 거친 후 마침내 재혼을 결심하고, 주위에 재혼하고 싶음을 당당히 알린 후 얼마 되지 않아 나를 소개받아 어찌보면 쉽게 재혼에 성공했다. 


다만 남편은 나를 만나기 전 홀로 살았던 기간 동안 불면증이 생겼고, 새벽에 구급차에 실려가기도 했으며, 장기의 일부를 떼어내는 수술을 받기도 했고, 별 것 아닌 운동을 하다 목주위가 두번이나 골절돼 몇 달 동안 목에 깁스를 하고 다니는 등 잦은 병원행을 했다고 한다. 


어쩌면 남편은 ‘살기 위해’ 재혼을 결심했을 것이리라 짐작해 본다. 살기 위해... 그리고 살기 위해서는 불행감을 떨쳐내고 '행복하게 살아야 했기 때문에' 남편은 새로운 사랑이 절실했을 것이리라.    

 

우리는 둘다 좋은 관계가 주는 행복의 비밀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쉽게 결혼에 골인했는데 초혼과 재혼의 온도 차는 어쩔수 없이 존재했다. 특히 남편도 간과한게 있었으니 재혼이라는 상황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이다. 남편도 ‘재혼은 처음이라’ 재혼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남편의 재혼 경력 없음의 결과는 신혼여행을 설계하는 시점부터 나타났다. 남편은 결혼 계획을 세우면서 내게 줄곧 부탁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신혼여행을 아이들과 넷이서 꼭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남편과 해외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어서 딱히 둘만의 신혼여행에 대한 로망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남편이 워낙에 ‘이것만은 해달라’는 투로 비장하게 요청한 것이라 고민할 여지도 없이 받아들였다. 우리 넷은 그렇게 결혼식 이틀 후 3박 4일간 괌으로 신혼여행이 아닌, 가족여행을 다녀온건데 하마터면 그 여행이 마지막 이별여행이 될 뻔했다.      


남편에겐 당시 20대 초중반 대학생이던 딸과 아들이 있었다. 아직 학업을 마치지 않아 부모의 보살핌이 여러모로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이런 상황의 애들에게 엄마와의 갑작스런 이별과 몇 년 안돼 맞게 된 아빠의 재혼소식은 분명 반길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아직 완전한 성인이 아닌 애들에게 더욱 쉽지 않은, 낯선 아줌마와의 여행은 마치 하기 싫은 숙제를 억지로 해야 하는 그런 마뜩찮은 일이었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누가 봐도 무리인 여행이었다. 결혼식 전 만났던 남편의 지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한사코 만류했다. 그런 여행은 신부한테도, 아이들에게도 고문이 될 것이라고까지 표현하며 말렸는데 평소 자기 주장이 강하지 않던 남편이 이것 만큼은 물러서지 않고 고집을 부려 실행하고야 만 것이다. 


'나와 애들이 빨리 친해지려면 같이 여행을 다녀와야 한다'는 것이 남편의 철벽같은 소신이었는데, 무슨 또래 친구 사귀는 여행도 아니고 그 짧은 여행으로 없었던 가족애가 갑자기 생길 리도 만무한데 재혼 무식자인 남편은 해외여행 며칠 다녀오면 우리 셋이 좀더 빨리 친해질 줄 알았던 것이다. 아직 엄마 잃은 상처도 다 아물지 않아 보이는 애들과 아이를 낳아 키워본 적조차 없는 초혼 아내가 그렇게 쉽게 서로 어울렁 더울렁 친해지기는 힘들다는 것을 남편도 재혼해본 적이 없어 잘 몰랐던 것이다. 



여행이 다소 꼬이기 시작한 것은 호텔에 도착하고 나서부터였다. 밤에 잠이라도 좀 따로 편하게 자야 하는데 하필 호텔 룸이 두 개의 방이 연결된 형태의 가족룸을 배정받은 것이다. 남편도 그런 상황은 굳이 원치 않았던 건데, 두 방 사이를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하는 남편과 아이들 덕분에 나는 특히 불편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래도 마음에 참을 인자를 그리며 참았다. 주위에서 너무 걱정해 준 때문인지 나도 ‘이번 여행은 애들과 친해지는데 방점이 있는 여행이니 잘 참고 애들을 위해 노력하자’ 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갔던 터라 사실 생각보다는 괜찮았다. 사람들이 우려했던 것보다는 스트레스가 적었지만 그렇다고 여행이 즐거웠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가족여행이 대부분 그렇듯 여행은 아이들 위주의 여행이 된다. 먹을 것이며 액티비티며 아이들의 취향에 맞게 설계됐고 나는 그저 눈치 보며 따라다니는 식이었다. 

      

그렇게 처음 애들과 며칠을 함께 지내다 보니 재혼가정으로 시집 온 여성이 맞닥트리는 현실이 비로소 무엇인지 어렴풋이 현타가 왔다. 남편과 아이들은 세상 무엇보다도 끈끈한 혈연으로 이어진 관계이고 20여년의 세월동안 켜켜이 쌓인 이야깃 거리가 넘치는 사람들인데 반해 나는 새롭게 이 세계에 진입한 초심자라서 공유할 이야깃거리가 별로 없다. 자연 화제는 셋만이 아는 화제로 한정돼 버리곤 해서 깔깔거리며 웃는 그들 셋 가운데서 나는 뭔가 이질감, 소외감이 종종 들기도 했다. 남편이 가끔 눈치를 보며 신경을 쓰긴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셋의 대화에 내가 어정쩡하게 동참하는 식이었으니 그닥 즐거울리 없었다. 


여행을 별 탈 없이 마쳤다는 안도감에 방심해서일까? 귀국한 다음날 남편과 만난 후 처음으로 한바탕 싸웠다. 사건 자체는 별 것 아니었으나 여행기간 누적된 스트레스와 함께 재혼가정에 뛰어든 내가 앞으로 처할지도 모를, 달갑지만은 않을 현실에 대한 과도한 우려가 결합해 마침내 폭발한 것이었다. 신혼여행 하다 헤어지는 커플도 있다던데 내가 그 주인공이 될 뻔했다. 


자식을 키워보지 않은 나는 내 경험에서 우러난 통찰적 판단 보다는 다분히 교과서적으로 판단하거나, 가족이나 친구들의 사례를 통해 다소 간접적, 피상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내 기준으로 봤을때 마뜩찮은 부분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에게는 당연한 것들이 내게는 이상한 것들로 보이고, 그 가정에서는 일상적이던 행동이 내게는 거슬리는 일이 될수도 있는 것... 이것이 하나의 독립된 가정에 주변인이 아닌 주인공 역할로 편입된 타인이 맞닥트리는 현실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큰 싸움으로 번진 우리의 신혼여행 마무리는 남편이 다음날 전주집으로 내려와서 내게 사과를 하고 앞으로 고쳐나가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으로 수습되었다. 무심코 되풀이되어 왔던 관계의 방식이 다른 이와 공존하려면 개선돼야 하는 것이 될 수 있음을 남편도 호되게 깨달으며 학습한 계기가 됐으리라. 딸도 내게 전화해서 죄송하다고 말해주어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하기도 했다. 그 애에게는 이런 낯선 만남이 없이 그저 친엄마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안쓰럽기도 했다.   


이렇게 재혼가정은 분명 재혼가정이기에 맞닥트려야 하는 독특한 면이 있는 것같다. 

다만 내가 재혼가정에 대해 성찰한 것은,  내 경우 자꾸 초혼자의 입장에서 어린 아가씨처럼 남편과 애들 문제를 미성숙하게 바라보려는 자세를 경계해야 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있어 아이들의 존재는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르기 전까지는 타인 아닌 타인인, 어려운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하며, 그리고 애들도 이 변화를 진실로 받아들이고, 스스로도 편안하고 성숙한 상태가 되려면 어쩔수 없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까? 결혼 전후 아이들과의 관계에 대해 조언을 구했을 때 주위의 결혼한 지인들은 모두 거리를 유지하고 살라고 조언해 줬었다. 애들 부터가 나랑 자주 소통하고 어울리는 것을 어려워할 거라고, 그저 아이들 문제는 아빠한테 맡기고 나는 우리 부부의 행복에만 집중하고 살라고 조언했는데, 5년이 지나고 보니 그게 기본적으로는 맞는 말인듯 하다. 


다만 그 5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애들도 부쩍 성장했고, 우리 넷은 가끔씩 만나 같이 술잔을 기울이며 웃고 울기도 했으며, 서로의 소식에 누구보다 더 기뻐해주고, 공감해주는 사이로 조금씩 뿌리내리고 있다.     


이렇게 우여곡절이 없진 않았어도 이후 더 이상의 큰 도전은 없이 우리는 그때보다는 훨씬 더 포용적인 공동체가 되었다. 남편도 아이들과 나의 사이에서 섣부른 조급함 없이 적당히 내게 알릴 것은 알리고, 본인이 알아서 처리해야 할 것은 알아서 처리하며 조화롭게 사는 듯하다. 나도 굳이 남편이 말하지 않는 것을 애써서 캐묻지는 않으나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는 확인하곤 한다. 사소한 것들까지 공유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에게, 그리고 애들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꼭 공유하고 상의하기로 약속했기에 그런 우리의 약속을 믿고 나는 나를 만나기 전 그들이 구축했던 세계도 존중해주려 하는 것이다.  


"여보~ 성님 성묘갈때 이것 가지고 다녀요~" 

어느날 깜찍한 휴대용 제기세트를 인터넷 쇼핑몰에서 발견하고 남편의 작고한 부인 성묘갈때 폼나게 가지고 다니라고 사서 건네주며 내가 쓱~ 하니 한 말이다. 웃길라고 '성님'이라고 표현한건데, 남편이 현 아내(?)의 생각지도 못한 기습 공격에 다소 당황스러운 기색이 없진 않았으나, 결코 싫지는 않은 표정으로 "고마워~ 잘 가지고 다닐께" 한다. 사실 명절에 남편과 그 분의 용인 야외 납골당에 같이 가서 예를 올리는 남편을 도와준 적도 여러번 있는데, 이왕이면 제대로 된 제기세트에 이쁘게 담아 놓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에 선물한 것이었다. 사실 처음 그 분의 영정 사진을 접했을 때는 다소 마음이 철렁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사실 인간적으로 짠하고... 안쓰럽고..., 고마울 뿐이다. 


생은 때론 ' 행복함'과 '그리 행복하지는 않음' 사이를 오가며 사는 것일 것이다. 그 진실 앞에 나 역시 예외가 아니므로 섣불리 좌절하거나 섣불리 환호하지 않으려 한다. 결혼생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까지는 행복이 대부분인 결혼생활이었지만, 이것이 생애 기간 지속되리라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라는 것쯤은 나도 안다. 


다만 나는 다짐한다. '바로 지금', 내가 붙박고 있는 '여기'에서 누리는 이 행복에 늘 눈떠 있을 것이며, 생생하게 행복을 느끼며 살아갈 것이다.  

     

자녀와 시댁이라는 산이 있다 해도, 남편이 재혼에 다소 준비되지 못한 태도를 노출한다 해도 나는 결혼을 후회하지 않는다. 아니 잘했다고 생각한다. 지금 행복하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나는 못말리는 중년 결혼예찬론자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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