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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지성 Apr 25. 2023

콤플렉스는 약이 된다, 중년에도

기나긴 열등감의 역사를 반추하며

돌이켜보면 나는 콤플렉스가 정말 많은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는 할아버지뻘 나이의 아빠가 콤플렉스였고, 가난이 콤플렉스였고, 또 여자라는 이유로 늘 차별대우받고 자라서 '사랑받지 못하는 자의 콤플렉스'가 있었다. 굉장히 열악한 재정의 사립 여자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지금 생각해도 함량 미달의 선생님들 때문에 부모님이 안 찾아오는 보통 성적의 나 같은 학생들은 존재 자체가 콤플렉스일 정도였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이미 학교명이 여러번 바뀐 상황이었는데 내가 졸업한 이후에도 교명이 여러 차례 바뀌어 지금은 온라인으로 학교이름 찾기도 힘들 정도로 재단이 열악했다. 이렇게 열악한 학교이다 보니 기부금을 내고 들어온 함량 미달의 일부 교사들에게 때때로 분풀이를 당하곤 해서 그렇잖아도 가기 싫었던 학교에 더 가고 싶지 않았었다.


성인이 되었어도 콤플렉스는 무한 연장되는 듯했다. 무엇보다도 20대 여성들에게 특히 민감한 외모 콤플렉스가 있었다. 나는 당시 심하게 말랐었는데 성장기에 방황하며 밥을 잘 안 먹은 덕분인지 키가 일찍 성장을 멈추더니 점점 야위어갔고 대학에 들어올 무렵부터는 말라깽이가 되어있었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말랐냐 살 좀 쪄라' 이런 얘기를 들으면 어정쩡하게 웃고는 있었지만 정말 듣기 싫었다. 사람들은 살이 찐 사람에게는 예의상 살 좀 빼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서 마른 사람에게는 그 예의가 작동하지 않는 듯했다. 지금 나는 살이 많이 쪄서 중년스러운 몸매가 되었는데 이런 몸매에 크게 스트레스를 안 받는 이유도 오랜 세월 받은 말라깽이 취급 때문에 통통해진 지금에 대한 문제의식이 덜한 듯하다. 아이고~ 이젠 살 좀 빼야 하는데!      

대학 시절엔 단짝이었던 미모의 동기에 비해 남성들에게 대시를 받지 못해 콤플렉스를 느꼈고, 공채로 입사한 회사에서는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 업무 환경에서 여성이라는 것이 콤플렉스가 되기도 했다. 직업 콤플렉스가 극복된 이후엔 여러 차례 밝혔듯 실기한 결혼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몇년 허덕이기도 했고, 학문의 세계에 들어와서는 무한경쟁인 이 세계에서 한없이 연구능력 콤플렉스를 느끼고 살았었다.      


이루 열거하기도 너무 많은 콤플렉스 투성이인 나는 지금 그 시절에 비하면 콤플렉스가 현저하게 없어졌다. 


열등감이 없어져서 편안하고 좋긴 한데 어느 날 문득 열등감이 내 생활에서 어느 정도 의미 있게 사라진 이후 내 인생의 도전 역시도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위 헝그리정신이 없어진 이후 나는 많이 게을러졌고 대충 사는 삶에도 익숙해진 듯하다. 이제 전전긍긍 스스로를 필요 이상 들볶지는 않는, 나이가 준 지혜도 었겠지만, 뭔가 도전이 사라진 삶은 가끔씩 스스로에 대한 죄의식 비슷한 감정을 준다. '내가 이렇게 게으르게 살아도 되나?' 하는 생각... 물론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게을러져 그냥저냥 세월을 흘려보내며 꽤 오랜동안 살아온 듯하다.        


더 이상 열등감을 예민하게 느끼지 않기에 속 편하고 좋으나 너무 게을러졌다는 죄의식이 그 자리를 차지한 지금, 열등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사실 권위 있는 학자들도 열등감의 미덕을 찬양해 왔다. 정신분석의 대가인 칼 융은 콤플렉스를 인간이 가진 어두운 면이지만 앞으로 또 성장할 수 있는 면이라고 했고, 알프레드 아들러는 아예 열등감을 더 나은 생으로 인간을 동기화시키고 추동하는 정말 중요한 능력이라고 했다. 열등감이 없는 인간은 없으며, 혹여 열등감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열등감이 없어서가 아니라 통찰이 없는 사람일 뿐이라고 일갈했다. 

 

열등감은 이렇게 내 인생에서 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사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할 여지가 많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러우면 지는 거다’라는 말은 한참 잘못된 말이다. 부러워해야 자극되고 발전한다. 다만 부러워하는 선에서 그치면 안 되고, 부러운 사람을 잘 관찰하고 모델링해서 스스로 체화시켜야 한다. 이것은 행동주의이론에서 말하는 학습의 보편적 단계이기도 하다.       


콤플렉스가 병적으로 발전하면 안 되며 콤플렉스를 인지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성찰하고 노력하게 되는 구조는 분명 생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끈다. 나도 내가 그 수많은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지금 이렇게 편안해진 것은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보다 존중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절실함이 청춘의 삶 전반에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한마디로 융과 아들러가 말한 콤플렉스, 열등감이 나의 삶을 보다 나은 삶으로 나아가려는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시켰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게으름이 자리한 중년의 이 즈음, 다시금 콤플렉스를 소환해야 할 것 같은 생각에 설레이기도 하고 다소 도전도 된다. 생각만 하고 밀쳐두었던 일들을 오늘부터 하나하나 시도해야겠다. 아직은 좀 더 열심히 살아야 할 나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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