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중년에 대하여
“사람들이 왜 그렇게 헬쓰장에서 열심히 운동하는지 아세요? 외로워서 그래요”
다소 오래된 일로 기억되는데, 배우 차인표씨가 티비 예능프로그램에 나와서 한 말인데 지금도 가끔 기억이 날 정도로 인상깊은 말이었다.
당시 남자 몸짱 열풍을 일으킨 주인공이자 실제 하루에 서너시간을 운동하며 보낸다는 차인표씨가 한 이 말은 너무 의외의 말이기도 해서 더욱 기억에 남았는데 그 뒤 살면서 꽤 설득력이 있는 말이라는 것을 실감하곤 했다. 나 역시 40대 싱글 시절 금요일 저녁이 되면 일에 대한 해방감과 주말을 앞둔 여유로움이 더해져 사람을 찾게 됐는데 그때마다 만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예전에 비해 눈치가 봐져서 냉큼 전화기를 들지도 못하는 패턴이 반복되고 보니 심심해서라도, 외로워서라도 헬쓰며 요가, 필라테스 같은 운동프로그램에 거금을 주고 가입하곤 했었다. 물론 몸치에다 게으름이 천성인 나는 대부분의 3개월, 6개월치 프로그램을 한달도 못채우고 돈만 날리고 말았지만 말이다.
“운동을 하고 열심히 일하고 주말엔 영화도 챙겨보곤해... 헌데 너무 외롭다” 외로움을 노래한 대중가요 가사처럼 지적인 현대인들의 삶에 있어 중요 실존적 문제가 바로 이 외로움이 아닌가 싶다. 점점 더 개인주의화가 심화되고, 인권감수성이다 성인지 감수성이다 해서 혹시라도 인권 침해, 성희롱이 될까봐 농담 한마디도 제대로 못던지고 꼭 해야할 말만 하고 사는 요즘의 사회는 안그래도 외로운데 더 사람을 외롭게 만든다.
친구 간에도 먼저 말하지 않으면 애써 개인적인 것들을 묻지 않는게 기본 에티켓이 되어버린 세상이 되고 보니 타인의 근심어린 얼굴에 걱정이 되어 지그시 물어보는 그 애정어린 마음 씀씀이가 불필요한 오지랖으로 둔갑되어질까 나 역시 애정 표현, 관심 표현을 최소화하고 산지 오래 되었다. 그러면서도 아날로그 시대에서 성장해 디지털 시대를 사는, 어쩔수 없이 반은 신세대, 반은 구세대적 하이브리드적인 습성을 가진 나로서는 문득 문득 내가 너무 무심한 사람은 아닌지, 아까 이야기할 때 좀더 꼬치꼬치 물어봐주지 않은 것을 친구가 서운해하지는 않았을지... 집에 와서 뒤늦게 후회를 하곤 한다.
온통 몸을 잘 만든 사람을 추앙하는 프로들이 언젠가부터 많아졌다. 예전에는 여성의 몸매와 얼굴을 강조하는데 집중했다면 언젠가부터 남성의 근육질 몸매가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관심사가 되었다는 것이 변화한 점이라면 변화된 점이다. 언제부터 우리 사회가 이렇게 몸에 집착했나? 몸이 중요한 건지, 차인표씨 말처럼 외로움을 이길 수단으로서 겸사 겸사 선호되는 것인지 새삼 궁금하다.
헬쓰 뿐인가? 이전에 살았던 집 주위에는 등산하기 좋은 야산이 근처에 있었는데 조금 늦은 출근을 하는 평일날이면 등산복을 입은 중년의 남녀들이 꽤 많이 산을 오르는 모습을 목격하곤 했었다. 50대 즈음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아마도 조기 은퇴 이후 딱히 할 일도 없고 건강 관리도 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매일 열심히 산을 오르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할 일이 없어서건, 건강을 위해서건, 외로움을 극복하고 시간을 떼우기 위해서건... 이래 저래 운동이라도 해야 하는게 중년인가 싶다.
어쨋건 중년이 되니 외롭다는 느낌이 불쑥 불쑥, 꽤 자주 든다. 실제로도 외롭기도 하지만, 에너지가 외부에서 내면으로 향하는 중년의 대표적 특징 중의 하나가 외로움이라서 더욱 그런 것일 확률이 높다. 한마디로 생애주기적 특성상 성찰적이 되어가면서 외롭다는 자의식이 도드라지게 꿈틀대는 시기가 중년인 것이다.
여기에 더해 현실적인 조바심도 한몫한다.
이제까지 살아온 세상도 만만치 않았을 뿐더러 앞으로 노인이 되기전 마지막 불꽃을 피워야 한다는 조바심, 그리고 어쩔수 없이 건강 조심하며 소극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노년기를 최대한 늦춰야 한다는 생각에 마지막 안간힘을 써보지만 때때로 이 또한 욕심인가 하는 생각에 문득 문득 외로워진다.
이즈음 친구들 부모의 부고소식은 이미 다반사이고, 어느순간 형제들의 부고 소식도 그리 드물지않게 들려온다. 부모의 부고소식과는 달리 지인들 형제의 부고소식은 충격적으로 나이를 자각하게 한다. 이제 죽음이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니라는 자각은 생각보다 삶을 드닷없이 공포로 뒤덮는다. '죽음 불안'이라는 드닷없는 이슈와 그래도 아직은 청춘시절에 더 가깝다는, 애써 다독이는 마음 사이에서 시소를 타며 역시 실존적 외로움을 느끼지 않으래야 않을수 없다.
이렇게 인생 항로의 중간 지점에서 자꾸 뒤를 돌아보면서도 앞으로 가야할 곳을 생각하며 터벅 터벅 걸어나가야 하는 중년엔 그래서 자꾸 외롭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중년에 외로움을 주는 실존적 문제들이 사실은 강도와 빈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이전에도 존재했었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중년의 문제는 인생 내내 만나왔던 문제이고 앞으로도 만날 문제들일 뿐인데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살다가 중년에 와서야 새삼 발견했을 뿐이라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멋모르고 살았던 시절엔 인지하지 못했던 삶의 신산스러움이 중년에 와서야 비장함으로 때때로 다가오는 것이다.
인생 중간에 선 중년!
젊었을 때 세웠던 그많던 원대한 계획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어도, 앞으로 남은 생은 조금만 계획하되 꼭 실행하는 삶이었으면 하고 바래본다.
그래도 중년,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