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유산
"입하" 봄이 끝나고 여름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엊그제 입하가 지났음에도 아직 새벽에는 쌀쌀하다. 출근 준비를 하면서 감기라도 걸릴까? 조심스러워 얇은 외투를 챙겨 입으며 아내에게 한마디 툭 던진다.
"여보! 처가댁에서 식사 한번 해야 하지 않아요?"
어버이날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는데 회사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이미 했었어야 할 때늦은 질문을 아무렇지 않은 듯해본다.
"글쎄.... 요즘 우리 회사도 일이 바빠서.... 내일 당장은 안 될 것 같고, 말씀드려서 날 잡아 볼게요." 마침 아내도 회사 일이 바쁘다고 하니 부부의 의견이 하나로 금방 합쳐진다.
"저녁은 바로 못 먹더라도 꽃은 가져다 드려야지. 서운해하신다. 내가 사서 가져다 드릴까?"
"우리 회사 1층에 꽃집이 있으니깐 내가 사서 가져다 드릴게요."
"그래요. 그렇다고 정말 꽃만 가져다 드리지 말고, 용돈도 두둑이 넣어드려요. 비록 우리 집 살림이 넉넉하지는 않지만, 당신 용돈으로 조금 더 챙겨드리면 좋겠네요."
살짝 농을 섞어 아내에게 이야기했다.
"그래요." 아내 역시 그 말이 농인 줄 알고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건강하셔서 처가댁은 어버이날 꽃을 두 송이 준비하지만 본가는 10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줄곧 한 송이의 꽃을 준비해 왔다.
어머니는 꽃을 참 좋아하신다.
"저 작은 줄기에서 온 힘을 다해 피워낸 저 꽃들이 예쁘지 않으면 무얼 예쁘다고 해야 하니?"
꽃을 보면 어머니는 매번 같은 말씀을 하신다.
“바쁘다.” 요즘 젊은이들이 입에 버릇처럼 달고 사는 말이다.
“다음 주에 밥 한번 먹자. 시간 괜찮아?”
“다음 주까지는 바쁘고.... 그다음 주에 보자. 어때?”
요즘은 약속 하나를 잡더라도 적어도 2주 전에는 잡아야 자연스럽다. 바쁘다고 하면 그러려니 하고 만다. 그들의 일상에 관여하고 싶지 않은 심리가 작용한 것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바쁘다.”라는 단어는 모든 상황을 이해하게 하는 참 편리한 요즘 시대 마법 같은 단어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가벼운 단어가 된 것 같기도 해서 아쉽기도 하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청년 시절에는 매우 바쁘셨다. 특히 봄에는 “치열하게” 바쁘셨다. 아버지는 직장을 다니면서도 집 하고 도보로 한 시간 좀 안 되는 곳에 있는 두 마지기 조금 넘는 논농사를 거의 혼자 지으셨다. 쉬시는 날이나 회사가 좀 일찍 끝난 날에 별일 아닌 듯 삽자루 하나 드시곤 “잠깐 논 좀 보고 오게요 “하곤 가셔서 논을 갈고 물을 대고 못자리를 하고 모내기를 했다. 이 모든 과정을 “사람”이 했다. 그리고 추수할 때까지는 그 끝없던 잡초 “피”와의 김매기 전쟁이었다. “돌아서면 피워내나 봐.... 그래서 피라고 하나벼...” 아버지의 말씀이다. 매년 10월쯤에 벼를 추수하게 되면 그 쌀들은 그다음 해 추수하는 10월까지 우리 다섯 식구가 목숨을 연명할 생명줄이었다. 다섯 식구의 생명줄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그 시절 청년이었던 아버지의 “바쁨”이었다.
어머니 역시 직장 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집 앞뒤에 있는 작은 텃밭을 이용하여 고추, 콩, 무, 배추, 참깨, 들깨등을 심어 반찬거리를 만들어 내셨다. 마찬가지로 봄에 들어서면 밭을 갈고 골을 내고 모종을 심고 넘어지지 말라고 대를 치고 김매기를 하였다. 텃밭은 김매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물 주기, 농약 치기의 전쟁이었다. 수도가 없어 집 마당에 있는 샘의 수동펌프로 물을 끌어올려 한 양동이씩 밭으로 나르는 것을 무한으로 반복했다. 8월쯤 되면 고추는 태양처럼 빨갛게 익게 되고 “사람”이 손으로 일일이 따고 말려 고춧가루가 되었고 뒤이어 콩과 깨들이 무르익어 어머니가 직접 단을 베고 말리고 도리깨로 콩과 깨를 털어내어 콩은 삶아서 메주로 만들고 숙성되면 된장이 되고 간장이 되었다. 참깨와 들깨는 반찬의 감칠맛을 더해주는 참기름과 들기름이 되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 10월쯤 되면 무, 배추 또한 “사람”이 손으로 직접 거두고 다듬어 무는 청을 떼어내어 시래기와 동치미를 만들고 배추는 1년을 지낼 수 있는 수백 포기의 김치가 되었다. 냉장고가 없으니, 아버지는 뒷마당에 땅을 파내어 여러 개의 장독을 묻고 그것들을 일일이 담아 저장하였다. 그것은 쌀이라는 생명줄을 보강해주는 우리 다섯 식구의 1년 치 반찬거리였다.
이것이 청년이었던 어머니의 “바쁨”이었다.
그 시절의 인건비는 초라했다. 부부가 틈틈이 일하지 않으면 가족을 지킬 수 없었다. 부부는 부업으로 마당 한쪽에 돼지막을 직접 지어 여남은 마리의 돼지도 키웠다. 사료는 따로 사지 않고 이틀에 한 번 30분 정도 거리의 시장에 있는 지인식당에서 남은 음식물을 모아놓으면 지게를 지고 그 거리를 걸어가 지게 양쪽에 가득 찬 양동이 두 개를 걸고 30분을 다시 걸어왔다. 쉬는 날 없이 돼지들의 하루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였고 돼지막 청소는 덤이었다.그때 나온 분뇨는 모아두었다가 텃밭의 훌륭한 거름으로 사용 되었다.그 시대에는 버리는것도 없었다. 그러는 중에 돼지가 새끼를 치게 되면 시장에 들고나가 파셨고 이것은 빠듯한 살림에 조금의 여유가 되어 우리 삼 남매를 키우고 공부시키는 밑천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 집 일이 끝났다고 해서 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시절에는 “품앗이”라는 문화가 남아 있어서 각 집의 논일과 밭일을 시간 맞춰 마을 사람들이 서로 도와 서로의 바쁨으로 서로의 궁핍을 극복하던 치열했던 시대였다. 자급자족하던 시대와 산업화가 들불처럼 일어나던 시대가 겹쳐지던 때라서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역할을 해야 했던 거 같다. 기억으로는 아버지는 주 6일 근무에 거의 매일 야근을 하셨고 어머니는 새벽이 되면 식구들의 아침을 준비하고 아이들이 학교라도 가게 되면 국민(초등) 학교는 점심 도시락만 쌌지만, 아이들이 빠르게 자라 중고등학생이라도 되면 점심과 저녁 한 명당 두 개의 도시락을 매일 새벽에 준비해야 했다.
더욱이 아버지 세대는 대부분 육 남매 이상이라서 큰집 작은집 식구들의 생일 챙기기, 거기에 유교문화도 남아있어 고조대까지 제사를 두 달에 한 번씩은 챙기고 명절에 차례를 지냈다. 살면서 필요한 것들은 오일장이 서면 30분 거리의 시장을 걸어가서 장을 보고 다 사람이 지고 다시 그 길을 걸어와야 했다. 형제간에 우애가 좋아야 한다고 1년에 한 번은 집에서 음식을 준비하면서 남매 계를 했고 그 많은 조카들의 졸업, 입학, 결혼등을 챙겼으며, 나라에서 초가집을 없애고 마을 길을 넓힌다는 “새마을운동”을 시작하니 수시로 동원되어 필요한 노동력까지 무상으로 제공해야 했다. 그리고 선거라도 있으면 당원으로 차출되어 선거운동까지 집집마다 찾아가서 당을 선전하는데 동원되고 투표날은 선거위원으로 하루 종일 투표장을 지키곤 했다. 그때 우리 부모님들의 나이는 마흔도 안된 삼십 대 후반의 청년들이었다. 이 와중에 5월이 되면 가정의 달이라며 어버이날, 어린이날, 스승의 날까지 다 챙기셨다. 주말 저녁에 전파가 불완전해 지글거리면서 나오는 14인치 흑백 TV로 보는 드라마가 문화생활의 전부였다. 그 시절의 부모님들은 정말 어른이자 슈퍼맨, 슈퍼걸이었다.
그 시대의 “바쁘다”란 단어는 무게가 있었다.
그토록 치열하게 바쁘게 살아오셨음에도 노년에 들어선 어머니는 나에게 몇 번이나 같은 말씀을 하셨다.
“나에겐 그 시간이 매우 그리워. 내 인생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정말 황금같이 귀하고 행복했던 시간이었어.” 어머니는 그 시절이.... 자기 생활이란 것은 없는 오직 가족이 전부였던.... 그토록 치열하게 바쁘셨던 그때의 시간이 자기 인생에서의 “황금기”이었다고 확신하며 말씀하신다.
“그 작은 몸으로 온 힘을 다해 가정을 지켜낸 당신이 아름답지 않으면 무엇을 아름답다고 해야 할까?”
어머니는 꽃이셨다. 온 힘을 다해 가족을 피워내셨다.
자신의 삶은 비록 바쁘고 치열했지만, 가족이라는 꽃을 분명하게 피워내셨다.
내 아이의 행복한 미소를 보고 있자면 먼저가신 아버지와 우리곁에 계신 어머니의 꽃 피워 내는 삶이 우리 부부를 통해 이어지고 있고 가족이 꽃피워지는 아름다운 삶은 우리 아이의 세대에도 이어지리라 는 것을 확신하게 한다. 아이는 자라면서 보아 온대로 배우고 살아갈 것이기에 더욱 그럴 것 같다. 이것이야말로 치열했지만... 그 아름답던 시절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리들과 영원히 함께 하시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마치 “신앙”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