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27일 (수)
안녕하세요, 오늘은 저의 디지털 노마드 체험판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저는 지금 프라하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정상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몰래 이렇게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들께 당당하게 경험을 나눌 수 있다는 걸 먼저 밝힙니다. 저희 회사는 지금까지 계속 재택근무를 하고 있어요. 그동안 심각한 코로나 상황 때문에 재택근무를 한 거라 카페나 여행지 등 사람 많은 곳에서 근무하는 건 규칙상 금지였습니다. 저는 원칙을 참 잘 따르는 스타일이라 지난 2년 내내 정말 두 번 빼고(답답해 죽을 것 같아서 카페 가서 일한 적 있음을 고백합니다.) 착실히 방구석에서만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 여행을 고민하던 5월 초쯤 장소 규제가 풀린 거예요. 해외에 가서 일해도 좋다고는 권장하지 않았지만요. 워낙 자유로운 분위기이긴 해서 암암리에 여기저기 항공권 알아보는 분들이 생겼어요. 처음 제가 생각한 이번 여행은 약 일주일 정도였거든요. 연차를 끌어 모아 쓴다고 해도 제가 맡은 일이 있고 아직 해외여행을 많이 가진 않는 분위기 때문에 그 이상은 무리겠지 눈치를 살살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리더님과 면담 시간에 여름에 유럽 여행을 가려고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일주일쯤 생각하고 있다고 하니 그 정도로 되겠냐고(!) 가서 며칠 일해도 되면 하고 와(!!)라고 하시는 게 아니겠어요. 그 길로 찬찬히 HR에도 문의하고, 사내 보안망 담당 부서에도 해외 사용 문제없는지 확인하고, 팀원 분들에게도 몇 달 전부터 말씀드렸지요. 저 꽤 길고 은근한 준비를 해왔어요. 무엇보다 더 오랜 기간 동안 제가 어디에서 언제 일하든 딴짓하지 않는 사람이란 믿음을 주었기 때문에 큰 반향 없이 이 선구적인 시도를 성공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팀에서 제 별명은 AI(기가나니.. 뭔가 물어보면 다 찾아내고 대답해서 AI냐고 농담하실 때 SNL 기가후니를 조금 따라 하면 빵 터지십니다.)예요. 솔직히 제가 그렇게까지 성실하진 않은데 착실한 이미지가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되네요.
유럽에서 일을 하다니! 좀 더 머무를 수 있다니! 하면서 시차를 계산해보니 오후 4시부터 새벽 2시 정도까지만 일하면 되더라고요? 와 별거 아니다 딱 좋다 했는데, 직전에 다시 생각해보니까 제가 시차를 잘못 계산한 거였습니다. 유럽이 일곱 시간 느린 건데, 빠르다고 생각해버렸어요. 저는 지금 새벽 3시부터 낮 12시까지 근무를 하는 중입니다. 뜻밖의 유럽에서 미라클 모닝인데요. 이런 경험을 살면서 또 언제 해보겠어요. 오히려 노을도 보고 낮에 돌아다녀서 좋아요. 아홉 시 반쯤부터 자고 일어나니까 할만하더라고요. 일하다 호텔에서 멍하니 조식 먹으면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헛웃음이 나요. 앞에 보이는 풍경은 예쁘고요. 노트북 속 현실은 너무 정신없고요. 하반기 대응으로 할 일이 급 많아졌는데도 마음이 조이거나 머리가 아프기보다는 '그냥 해버리지 뭐' 느긋한 마음이 이어졌습니다. 눈앞의 풍경 때문에 아직 현실 감각이 없는 건지 여행으로 여유가 더 생긴 건지는 돌아가 봐야 알겠죠? 이런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도 행운이고, 좋은 타이밍이었고, 쉽지 않은 것이란 걸 생각하면 마냥 감사해집니다.
유연 근무제이지만 현실적으로 협업을 해야 해서 공통 업무 시간 10시 - 7시로 근무를 하는데요. 7시 퇴근이라는 게 저는 너무 싫어요. 한여름이 아니면요, 대부분 7시는 깜깜한 밤입니다. 그러면 하루가 다 가버린 기분에 퇴근과 동시에 마음이 눅눅해집니다. 실제로 햇살을 좀 가지고 싶어서 미라클 모닝을 여러 번 시도해보기도 했는데, 늦은 밤까지 야근을 하면 또 그것도 금방 무너지더라고요. 하루가 가는 게 아침이 오는 게 아니라 또 다른 밤이 계속 계속 낮도 없이 절 찾아오는 것 같았어요. 100% 재택근무가 이렇게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답니다. 돈을 버는 동안에 낮을 포기하는 기분만큼은 해도 해도 적응이 잘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8시간을 근무하고 퇴근을 했는데, 문 밖이 프라하라니. 아직 12시의 한낮이라니. 저는 이 사실 자체가 정말 행복했어요. 피곤해서 챙겨 온 간 영양제 밀크씨슬을 먹고 눈이 벌겋게 충혈되었지만 잔잔하게 들려오는 바이올린 소리에 아드레날린이 솟는지 석방된 사람 마냥 햇살을 막 잡아보기도 하고요. 피로가 느껴지지 않아 의아했습니다. 친구가 저 프라하 파견 합격했을 때 생일 선물로 준 프라하 여행책의 먼지를 툭툭 털어 가져온 걸 호텔의 포근한 침구에 엎어져서 후루룩 둘러보고 몇몇 장소와 맛집을 저장해서 나왔습니다. 원래 가려던 식당은 정원에 붙어 있었는데 대마초를 피는 열댓 명의 집단을 지나가야 되길래 바로 포기했어요. 자연스럽게 돌아 나와서 강변에 있는 식당에 갔습니다. (체코는 대마가 18년 말부터 합법이 되어 온갖 대마 사탕, 쿠키, 껌, 음료수 별걸 다 팔아요.) 퇴근하고 생맥 한 잔 하는 기분은 원래도 좋은데 앞에 까를교가 있잖아요. 음식은 밍숭맹숭 별 맛도 없어서 소금을 잔뜩 뿌려 우왕앙 먹었지만 다 먹고 나와 옅은 취기에 맘마미아 노래를 들으면서 어떤 다리를 건너는데 정말 신나고 행복했어요. 딱 '댄싱 퀸'이 나왔거든요. 제가 뭘 걱정해야 하고 압박감을 느껴야 하는지 까먹었어요. 비행기에서부터 고민해보죠 뭐. 머리는 내일 근무 시간에 쓰면 되죠. 가다 보니 다리 중간에 뜬금없는 엘리베이터가 있더라고요? 저도 따라 내려가 봤는데 그곳은 숨겨진 비밀 정원이었습니다.
프라하는 한국인들이 특히 사랑하는 유럽의 여행지라 여기서 한국 분들을 자주 마주치는데요, 이곳은 그리 알려지지 않은 곳인지 동양인은 저밖에 없고 다 현지 분들 같아 보였어요. 세상 사람들 여기 좀 내려와 보라고 소문내고 싶었다니까요. 블타바 강에 떠있는 작은 섬인데, 강을 보게끔 벤치가 쭉 있고 앞에선 보트를 타는 사람들이 잔뜩이에요. 한쪽에서는 어떤 아저씨가 비버? 꽤 큰 비버와 오리와 비둘기에게 동시에 먹을 걸 주고 계신데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신기하게 쳐다보면 아저씨가 인자하게 '자네도 줘볼래?' 하면서 먹이를 건네요. 저는 설치류를 무서워해서 괜찮다고 눈짓을 보내고 구경만 했어요. 비둘기도 막 손에 앉아서 밥을 먹던데 그 아저씨 진짜 웃기고 인자해요. 갈 때쯤에는 못 보던 백조도 와서 밥 먹더라고요. 벤치에 앉아서 사방팔방 계속 구경하고, 필름 카메라도 아까운 줄 모르고 팡팡 찍었어요. 소박한 푸드트럭 세 개가 나란히 있어서 차이 라테 한잔을 시켜 호호 불어 마시면서 메모를 적었어요. 프라하는 지금 최저 기온 13도 최고 기온 23도 정도로 여름 같지 않고 응달은 꽤나 쌀쌀해서 따뜻한 차 한잔 마시기 좋답니다.
그냥 뭐 공원인데, 그냥 여기서만 있어도 또 어딜 가지 않아도 괜찮다 싶어요. 이번 여행에 저 자주 이러네요. 물 있고 공원에서 햇살 받는 거 그거면 충만하다고 충분하다고 자꾸 생각하네요. 제가 그동안 놓친 햇살들을 여기 와서 더 오래오래 다 받고 있는 거 같아요. 선크림을 한 겹 더 발라도 해가 강해서 실시간으로 피부가 늙고 주근깨가 늘어나는 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뭐 괜찮아요. 어쩌면 제가 이렇게 긴 낮을 찾으려고 이 여행을 온 게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돌아가서도 날이 좋은 주말엔 근처 공원에 가서 책을 읽을래요. 꼭이요.
Shooters' Island
https://goo.gl/maps/UbRjyLELYoiyjaUz5
정말 아름답다 느껴지는 게 사방팔방에 있으면 자꾸만 걸음을 멈추게 됩니다. 두 걸음에 한 번 씩 자꾸만 멈춰 서서 사진을 찍다 보면 사소한 것들이 아쉬워져 다른 곳에 가지를 못합니다. 그만 가자 하는 자아와 그래도 조금만 더 볼래 하는 자아가 끝도 없이 싸웁니다. 오늘은 그냥 공원 투어 하는 날로 맘먹고 강 건너 깊숙이에 있는 리에르고비 공원에 찾아갔어요. 높은 곳에 있는 공원이라 언덕에 사람들이 잔뜩 앉아 쉬는 곳이에요. 제가 한 7시쯤 도착해서 해가 아직 높이 떠있었습니다. 해를 아무리 좋아해도 그렇게까지 정면에 있으면 눈이 안 떠지더라고요. 들고 온 책으로 해를 가려서 한참 읽고요. 노을 하면 또 가장 잘 어울리는 라라랜드 음악을 들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그 언덕에 자리를 잡고 앉는데 꼭 공연장 같았어요. 노을이라는 공연을 보려고 북적북적 모이는 사람들, 경사진 잔디밭이 계단식 관객석 같아요. 한참을 정말 한참을 프라하를 한눈에 내려다보다 드디어 선글라스를 벗고도 앞을 볼 수 있게 되어 맨눈으로 붉은 해가 내려가는 걸 보았습니다. 언제 떨어지나 기다렸는데 막상 모습을 감추는 데에는 몇 분 걸리지 않았어요. 오래 기다린 짧은 공연이라 해가 쏙! 하고 들어갔을 때 왠지 박수를 치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저만 그런 건 아닌지. 옆에 있던 아이들이 박수를 대신 쳐주었어요.
하루에 딱 한 번 하는 공연을 보고 저는 또 내일도 일해야하기 때문에 (미라클 모닝하러..) 빨리 자야 해서 숙소에 서둘러 가는데 런던에서 튜브 잘못 탄 기억 때문에 트램 의심하다가 하나 놓치고 다음 거 타고 프라하 성 앞에 내렸어요. 프라하 성을 가로질러 가기만 하면 호텔인데 성이 10시에 문을 닫는다고 군인 아저씨들이 막아서는 거예요. 너무 당황했지만 시계 보니까 9시 55분이라 저는 저 너머 호텔에 가고 싶은 거라고 호소했더니 5분 만에 갈 수 있냐고 해서 뛰어가겠다고 했죠. 뜻밖에 짐 검사까지 하고 달려가는데 성은 성이더라고요. 왜 이렇게 넓고 웅장한가요. 야밤에 혼자 방탈출하는 기분 나서 웃기고 쫄렸어요. 다행히 성 탈출 게임은 잘 미션 클리어했습니다.
숙소가 프라하 성 바로 앞이라 어제오늘 그 유명한 프라하 성 스타벅스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글쓰기 여행을 하는 작가가 된 기분이에요. 오른쪽엔 붉은 지붕과 민트색 구조물들이 내려다 보입니다. 이 글쓰기 시간이 저의 조급함을 눌러주는 것 같아요. 여행이라고 꼭 급할 것 없다고요. 근무를 하느라 자기 전에 글을 쓰지 못하고 퇴근하고 레터를 보내고 있어요. 긴 휴가를 쓰고 복귀해서 수백 통의 메일이 쌓인 메일함을 열어보는 마음은 기계적이었는데, 이 레터를 보내는 메일을 열어볼 땐 그렇게 설렐 수가 없어요. 여러모로 양가적인 기분이 느껴지는 프라하 여행이네요. 디지털 노마드라는 거 시차가 견딜만한 곳이라면 몇 번쯤 더 해보고 싶어요. 일이 삶의 전부가 되지 않는 느낌이 참 좋아요. 직장인이든 아니든 하루 간 고생 많았을 모든 분들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오늘의 질문]
- 디지털 노마드의 꿈이 있나요?
- 일하면서 어떤 나라에 살아본다면 어디로 가실 건가요?
- 긴 휴가를 가본 적 있으세요?
- 직장인의 여행이란 무엇일까요?
RE: [나니의 빨간수첩] 12. 디지털 노마드 체험판
2022년 7월 29일 20:55
- from K
안녕하세요 나니 님~
요즘은 메일함을 열어보는 게 설레네용 ㅎㅎㅎ
몇 장의 사진과 함께 유럽에서의 일기를 읽다 보면 저도 그곳에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이 들거든요.
특히 마지막에 건네주는 질문들은 늘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는 거 같아요.
이번 질문들엔 답장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들어 메일을 적게 되었어요 :-)
- 디지털 노마드의 꿈이 있나요?
: 언젠가 한번쯤은 먼 타국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어요 :-) 기왕이면 느긋하게 즐길 수 있도록 3개월쯤!
- 일하면서 어떤 나라에 살아본다면 어디로 가실 건가요?
: 저는 휴양지 같은 나라에 떠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나니 님의 빨간수첩을 받아보고 난 뒤로는 유럽에 대한 로망이 생겼어요. 다음에 해외여행을 가게 된다면 유럽일 거 같네요.
- 긴 휴가를 가본 적 있으세요?
: 작년 10월에 제주도로 한 달 살기를 떠난 적이 있어요. 사실 제주도 한 달 살기는 2020년 초에 계획하던 건데, 코로나 눈치 보다가 결국 2년이 다 지나서야 떠날 수 있었네요. 늦었지만 제주도에서 보낸 한 달이라는 시간은 한순간도 후회한 적이 없어요. 여유롭게 늦잠 자던 아침, 계획도 세우지 않은 채 집 근처 바다로 가볍게 산책 나갔던 일상, 숙소 사람들과 함께하는 즉흥적인 놀이까지 뭐하나 빠짐없이 모두 즐거웠던 순간이었거든요. 1년도 지나지 않아서 그때가 그리울 만큼요 :)
- 직장인의 여행이란 무엇일까요?
: 사실 주위 사람들에게 지금 유럽으로 여행을 떠난 직장인 친구가 있는데 너무 멋지다며 그렇게 자랑 아닌 자랑을 해뒀거든요. 다들 궁금해하더라고요. 어떻게 직장인이 그렇게 훌쩍 떠나버릴 수 있는지. 저는 프리랜서 나 다름이 없어서 직장인의 입장에서 여행을 생각해본 적이 크게 없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나니 님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나니 이런 식으로의 경험도 가능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고요.
직장인에게 여행이란 '로망'같은 게 아닐까 싶어요. 사실 연차를 끌어모아 여행을 가도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떠나기란 쉽지 않으니까요. 게다가 막상 휴가철이 겹치면 숙박 요금, 비행기 표값은 비싸지 어딜 가나 사람이 많아 막상 가면 고생하는 일도 허다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연히 이 시간이 기다릴 정도로 일상에 설렘을 안겨줄 수 있는 로망 같아요.
앞으로 남은 레터도 기대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