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을 위한 성채, 낯선 이들에겐 불친절한 미로
극장의 불빛이 하나둘 꺼지고, 암흑이 객석을 삼켜갔다. 관객들의 웅성거림은 서서히 잦아들었고, 스크린 중앙에 '귀멸의 칼날'이라는 로고가 떠올랐다. 마치 오래 기다린 결투장에 발을 들인 검객처럼, 나도 모르게 등을 곧게 세우고 긴장으로 몸을 굳혔다.
익숙한 선율이 흐르며, 이야기는 망설임이나 준비 운동 없이 곧장 전투의 심연으로 뛰어들었다. 보통 극장판 애니메이션이라면 도입부에서 세계관을 다시 짚어주고, 등장인물을 하나하나 소개하며 관객을 천천히 안내한다. 그러나 《무한성》은 그 모든 친절을 생략했다. 설명도 없고, 감정의 숨 고르기도 없다. 대신 처음부터 날선 칼날이 맞부딪히는 굉음이 극장을 메웠다.
화면 속에서 무잔은 이미 상처 입은 채로 움직이지 못하고, 분노의 목소리로 주인공 일행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공중에서는 인물들이 낙하하며 다음 전투의 서막을 알렸다. 너무나 돌발적이고도 과감한 시작이었다. 그 순간 나는 직감했다. “아, 이건 팬들을 위한 영화다.”
《무한성》은 TV 애니메이션 4기 마지막 장면에서 끊긴 맥락을 곧바로 이어받는다. 마치 드라마의 다음 화 버튼을 누른 것처럼, 극장은 TV의 연속성을 고스란히 확장한 무대였다. 흔히 극장판이라 하면 초보자도 이해할 수 있도록 기승전결을 분명히 보여주곤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달랐다. “처음부터 본 사람만 따라올 수 있다”는 조건을 숨김없이 내세운 것이다.
그래서 나 같은 팬에게는 오히려 익숙했다. 호흡이 매끄럽게 이어지며, 이전까지 쌓아온 감정이 단 한 장면도 허비되지 않고 폭발하는 듯했다. 그러나 옆자리에 앉은 지인은 상황이 달랐다. 그는 스크린을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멋있긴 한데…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귀멸의 칼날을 꾸준히 본 사람이라면 익숙한 장면이 있다. 오니가 주인공 일행과의 사투 끝에 패배가 확정되는 순간마다 어김없이 ‘회상’이 들어간다. 오니는 칼날에 몸이 베어 나가면서, 혹은 태양빛에 타들어가면서 비로소 잊고 있던 인간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것은 단순한 과거사가 아니라, 그가 왜 오니가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자 변명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 시작은 불행이다. 가난과 기아, 가족의 상실, 사회적 배신, 억울한 누명, 버림받은 사랑….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 반복된다. 그 고통이 끝내 분노로, 원한으로, 혹은 간절한 소망의 왜곡된 형상으로 변질될 때, 무잔은 그 틈을 파고든다. 피 한 방울로 인간은 오니가 되고, 그 순간부터 인간적 기억은 희미해진다. 다만 마지막 순간까지 남아 있는 것은 ‘원한’과 ‘갈망’이다. 그것이 곧 그들의 존재 이유이자, 수백 년 동안 인간을 잡아먹으며 버틸 수 있었던 동력이 된다.
그러나 작가는 여기서 잔혹함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주인공 탄지로와의 전투 속에서 오니들이 하나둘 무너져 가는 순간, 회상 장면이 교차되며 관객은 그들의 ‘인간성의 잔해’를 목격한다. 이 회상은 액션의 맥을 끊는 대신, 오히려 이야기를 ‘비극의 무대’로 변모시킨다. 오니가 죽어가는 그 짧은 순간, 그들은 인간으로서의 얼굴을 되찾고, 때로는 감사와 미련, 심지어 구원의 감정을 드러낸다. 탄지로가 그들에게 건네는 연민 어린 시선과 함께, 한 편의 에피소드는 막을 내린다.
이것은 《귀멸의 칼날》 서사의 핵심 공식이자, 가장 독특한 미학이다. 단순히 "악을 처단한다"는 권선징악 구조가 아니라, "악이 된 존재들의 사연을 애도한다"는 애틋한 정서 말이다. 그래서 관객은 오니를 미워하면서도, 동시에 안타까워하게 된다. 결국 이 패턴은 반복을 넘어 ‘작가만의 언어’가 되었고, 이번 《무한성》 극장판에서 아카자에게 집중된 회상 역시 그 전형을 가장 웅장하게 확장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칼날이나 폭발음이 아니라 아카자의 얼굴이었다. 그의 회상 신이 켜질 때마다 화면은 순간적으로 부드러워지고, 아카자의 표정은 인간 시절의 기억으로 채워진다. 이 회상들은 구체적 사건을 줄줄이 나열하기보다 ‘상실’, ‘갈망’, 그리고 ‘어쩔 수 없던 선택’이라는 정서적 축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그런 파편들이 전투의 맥박 사이사이에 끼어들며 아카자의 현재 행동에 이유를 부여한다. 그래서 관객은 그가 ‘사악하기 때문에’가 아니라 ‘상처로 인해’ 그렇게 되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아카자는 전형적 악역을 넘어선다. 그는 적이면서도 피해자이며, 때로는 주인공만큼이나 감정적 서사의 중심을 차지한다. 탄지로와 그의 동료들이 ‘정의’와 ‘구원’을 쟁점으로 삼는다면, 아카자의 싸움은 ‘존재의 이유’와 ‘과거의 굴레’에 관한 것이 된다. 결과적으로 관객은 칼끝이 겨누어진 채로 ‘누가 옳은가’ 대신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묻도록 강요받는다.
이 방식은 서사적으로 크나큰 이득을 준다. 전투의 물리적 박력과 회상의 정서적 무게가 교차할 때, 장면은 단순한 액션 시퀀스가 아니라 인간 드라마의 축소판이 된다. 아카자가 한 번 숨을 고르는 동안 관객은 그의 삶을 잠깐 훔쳐보고, 그가 내디딘 선택들의 그림자를 보게 된다. 그래서 그의 패배도, 혹은 최후의 결단도 단순한 승패로 환원되지 않는다 — 관객은 거기서 연민이나 안타까움,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분노까지 느낀다.
하지만 이 전략은 동시에 리스크를 안고 있다. 회상이 과다할수록 액션의 긴장감은 순간적으로 풀리고, 속도감이 떨어진다. 초심자에게는 전투가 멈춘 듯한 인상만 남아 ‘이게 지금 왜 나오는 장면인가’ 하는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또한 아카자에게 주어진 분량이 많아질수록 이야기의 초점이 흐려져, 원래의 주인공들이 한발 뒤로 물러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이 극장판에서 아카자는 ‘악역이 주인공이 되는 역설’을 만들어낸다. 그는 싸움의 중심이자 감정의 축이 되어, 관객의 시선을 빼앗는다. 팬들에게는 오랜 맥락과 맞물려 깊은 울림을 주는 보상이 되고, 비팬에게는 다소 불친절한 서사적 장치로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카자가 남긴 잔영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적대가 아니라,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관객의 마음속에서 계속 질문을 던지는 무언가로 남는다.
작화와 연출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아카자의 주먹이 허공을 가르며 불꽃처럼 터져 나올 때, 스크린은 단순한 만화의 재현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무대로 변모했다. 제작사인 Ufotable이 그려낸 작화는 마치 무용수의 춤을 보는 듯 유려했고, 카메라워크는 실제 전쟁 다큐멘터리의 생생함과 뮤지컬 무대의 화려함을 동시에 담아냈다. 전투 장면은 단순한 액션을 넘어, 색과 소리와 움직임이 어우러진 일종의 오페라였다.
여기에 OST가 더해지면 그 체험은 배가된다. 관현악이 웅장하게 깔리고, 북소리와 전자음이 뒤섞이며 관객의 심장을 두드린다. 소년만화의 전형적인 외침, 동료를 지키기 위한 희생, 마지막까지 버티려는 의지가 음악과 맞물릴 때, 극장은 일종의 제의(祭儀)의 장처럼 바뀐다. 나는 단순히 ‘영화를 본다’는 수동적 체험을 넘어서, 전투의 한가운데에 끌려 들어간 듯한 몰입을 경험했다. 팬으로서 이 순간은 더할 나위 없는 보상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인정해야 할 부분도 있다. 팬이 아닌 이들에게 이 영화는 단순히 눈부신 액션의 향연일 뿐이다. 칼날이 부딪히고, 피가 튀고, 음악이 웅장하게 흐르지만, 그 안에서 흐르는 정서의 맥락은 쉽게 와닿지 않는다. 왜 귀살대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지, 무잔이 어떤 절망의 상징인지를 모르는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빠르게 흘러가는 눈부신 ‘장식’처럼만 보일 수 있다.
팬이라면 한 장면 한 장면에서 작가의 복선과 캐릭터의 성장 궤적을 떠올리며 감정을 더해갈 수 있지만, 처음 보는 관객이라면 “멋있다”는 감탄 뒤에 곧장 “그런데 왜 싸우는 거지?”라는 의문이 따라붙는다. 결국 이 영화는 ‘팬심에 대한 보상’이라는 성격이 강했고, 그 친절하지 않은 구조는 양날의 검처럼 작동했다.
왜 제작진은 이런 방식으로 극장판을 만들었을까? 어쩌면 답은 명확하다. 팬에게는 최상의 보상, 비팬에게는 미스터리한 갈증을 주는 것이다.
《무한성》은 이야기의 중간을 잘라내 극장판으로 내놓았다. 전통적인 극장 애니메이션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기승전결을 새로 구축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처음부터 봐야 한다”는 메시지를 노골적으로 던진 것이다. 팬들에게는 지금까지 쌓아온 시간과 애정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주고, 비팬들에게는 “뭔가 중요한 걸 놓쳤다”는 아쉬움과 호기심을 심어주는 방식이다.
실제로 내 지인은 영화가 끝난 뒤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왜 싸우는 건지 알아보고 싶다. TV 애니메이션을 처음부터 봐야겠어.”
바로 이것이 제작진의 노림수일 것이다. 불친절했기에 오히려 관객은 끌려 들어간다.
이러한 전략은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자주 목격된다. 《드래곤볼》이나 《원피스》의 극장판은 팬들을 위한 이벤트 성격이 강하다. 서사적 완결성을 강조하기보다는, 기존 팬덤을 결집시키고 새로운 관객을 원작으로 끌어들이는 ‘입구’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다. 《귀멸의 칼날》 역시 그 공식을 따르되, 더 대담한 방식으로 실행했다. “이 세계를 이해하고 싶다면, TV 시리즈와 만화 원작을 파고들라.”
결국 《무한성》은 한 편의 독립된 영화라기보다는, 팬덤을 강화하고 시장을 확장하기 위한 전략적 장치였다. 불친절 속에 숨겨둔 유혹, 바로 그것이 관객을 다시 원작의 세계로 돌려보내는 힘이었다.
《귀멸의 칼날: 무한성》은 결국 팬을 위한 웰메이드 극장판이다. 원작을 따라온 이라면 전투의 긴장감과 인물들의 서사적 무게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그들에게 이 영화는 단순한 액션 블록버스터가 아니라, 지난 시간 동안 쌓아온 감정과 애정을 결산하는 자리다. 화려한 작화와 압도적인 음악, 그리고 캐릭터의 과거와 선택이 교차하는 순간들은 팬들의 기억 속에서 더욱 깊게 울린다.
하지만 팬이 아니라면 이야기는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이 영화는 관객의 손을 잡고 친절히 안내하지 않는다. 주인공의 배경이나 적과의 대립 이유는 설명되지 않고, 곧장 칼날이 부딪히며 싸움이 벌어진다. 그래서 초심자에게 《무한성》은 거대한 성채의 외벽처럼 차갑고 낯설다. 그 안에 어떤 보물이 있는지 짐작할 수 없고, 어디로 들어가야 하는지도 모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불친절함’이 새로운 매력을 만들어낸다. 모르는 세계 앞에서 인간은 호기심을 느낀다. 실제로 내 지인은 영화를 보고 나서 “이야기의 맥락을 알고 싶다”며 TV 애니메이션을 처음부터 보겠다고 했다. 성채는 처음에는 접근하기 어려운 미로처럼 보이지만, 그 웅장한 실루엣 자체가 이미 강력한 유혹이 된다.
나는 극장을 나서며 이렇게 생각했다. 《무한성》은 분명 팬들에게는 황홀한 성채이고, 비팬들에게는 낯선 미로다. 그러나 바로 그 미로의 난해함과 성채의 장엄함이야말로, 새로운 이들을 다시 원작과 시리즈로 끌어들이는 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