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포르투갈과의 16강 전. 부쩍 축구에 관심이 생긴 초등 따님. 밤 12시에 보겠단다.
나: 너무 늦어. 내일 학교 가면 피곤하고. 저번에는 10시여서 그나마 보게 허락해줬지만.. 새벽 2시에 끝나면 피곤해서 안된다.
아이: 내일 쉬는 날이잖아.
남편은 걱정은 했지만 허락해 줬다. 그땐 금요일과 토요일 사이여서 주말 늦게까지 잘 수 있었다.
이번엔 새벽 4시 브라질과의 경기일정.
딸: 아빠. 나 이번에 일어날 수 있을까?
나: 그걸 어떻게 일어나게? 피곤해서 못 일어날 걸. 일단 엄마는 못 일어나.
남편: 이번엔 안돼.
딸: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고 했어. 친구들도 많이 본다고 했고. 그 기회를 놓칠 순 없어. 아빠. 허락해주세요. 네? 엄마는? 엄마는 허락해?
나: 좀 무리인 것 같은데.. 아빠가 허락하면 생각해볼게. (난처할 땐 남편에게 넘긴다. 사실 걱정은 해도 보여주고 싶은 마음 가득.)
딸의 설득이 시작된다.
딸: 아빠. 엄마. 월드컵은 4년마다 한 번씩이고 우리가 16강에 들어간 건 이번이 3번째라고 했어.
그만큼 기회가 적었고 아주 특별한 경험이라는 뜻이거든요.
나는 그냥 남편과 딸의 대화를 들으며 흥미진진하게 참관했고 가끔 한 두 마디 거들었다.
한 번은 딸을.. 한 번은 남편을...
남편: 일어나면 결과가 나와. 그거 보면 되고.
딸: 난 결과보다는 과정을 보고 싶어요.
남편: 브라질은 너무 잘해서 그 시간에 봐도 이길 확률도 낮고... 그냥 아침에 하이라이트 봐.
딸: 난 생생한 순간들을 보고 싶은 거예요. 선수들이 땀 흘리며 노력하고 포기하지 않는 장면을요.
나: 하긴.. 그게 중요하긴 하지.
남편: 나중에 또 16강 올라가면 그때 볼 기회들이 있을 거야. 지금은 너가 어려서 안돼.
딸: 오빠들은 되고 나는 안 되는 거예요? 어른만 되는 거예요?
남편: 오빠들도 시험 기간이라 안 볼 거야. 어른 되면 볼 기회들 많을 거야.
딸: 아빠. 난 지금 이 순간에 보고 싶은 거예요. 나중이 아니고.. 그땐 또 선수들이 바뀌어있고.. 난 손흥민을 좋아하는데 그때 손흥민이 뛸지 안 뛸지 모르잖아요.
나: (아이 말엔 오~ 설득력 대박인데 하면서 듣고 있다가) 감독이 되어있으려나? (딸은 진지한데 미안하게도 난 장난기 발동. 지금 생각하니 미안하다.) 손흥민은 유명하고 잘하니까 감독이 되어있을 테니 얼굴은 볼 수 있을 거야. (아이는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미웠을 듯 ㅠㅠㅠ)
딸: 난 땀 흘리며 뛰는 선수 손흥민을 보고 싶은 거라고요.
나&남편: .............
남편: 아빠도 못봐. 너 크면 그때 봐. 지금은 안 돼.
딸: 어른은 되고 아이들은 안 되는 건 공평하지 않잖아요.
남편: 어른은 조금 덜 자도 조절이 가능하지만 초등학생은 잠이 부족하면 문제가 되니까. 안 돼!
딸: 일찍 자면 되잖아요.
나: 얼마나 일찍? 저녁 8시에 자면... 새벽 4까지 8시간이니까 음.. 괜찮으려나?
딸: 피아노 다녀와서 밥만 먹고 바로 잘게요. 그럼 8시에 잘 수 있어. 그럼 허락하는 거죠?
남편&나: 10시에 자는 아이가 8시에 가능하겠어? 잠이 쉽게 들겠니?
딸: 그럴게요. 8시에 자고 혼자 일어나서 볼 수 있어요. 방법도 알아요. 온에어 하는 거 어떻게 하는지 알아요. 혼자 조용히 볼게요. 엄마, 아빠 안 깨우고... 내가 알람 맞춰 놓고요. 그럼 된 거죠?
남편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한번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다음 날. 결전의 그날
남편은 여전히 강경자세였다. 다음 날. 아이가 한번 더 물어본다. 마음이 약해진 나는 남편에게 부탁 어조로
물어본다.
<카톡 메시지>
나: 여보. 우리에겐 늘 있는 월드컵 일지 모르지만 아이에겐 지금 굉장히 중요한 순간인가 봐요. 매번도 아니고 16강은 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아이가 4년 후엔 많이 커있을 것이고 그땐 지금이랑 또 다른 아이가 되어있을지도 몰라요. 우리랑 아이는 생각하는 관점이 다르니까요. 아이에겐 이게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봐요.
그리고 자기가 못 일어나면 어차피 못 보는 거니까. 난 안 깨울 거고. 한번 믿어보죠.
남편은 내키진 않지만 아이가 일찍 잔다는 조건하에 조건부 허락을 해줬다. 아내인 나의 부탁을 거절하기가 어려웠던 모양. (나도 참.. 아이 말로 설득당한 건 나였던 거다.)
결국 아이는 저녁 8시가 아니라 이른 저녁 6시 50분에 누워서 잠을 잤다. (남편도 그런 아이의 실행력이 내심 신통했나 보다. 정말 놀랍게도 아이는 잠이 들었다.)
그리고 3시 50분에 알람을 맞추고 혼자 일어나서 조용히 방에서 축구를 봤다고 한다.
잠은 총 9시간을 잤고 약간 피곤한 모습이 보이긴 했지만 아침도 잘 먹고 시간 맞춰 학교에 갔다.
4:1로 졌지만 아이는 볼 수 있었다는 사실로 만족했던 것 같다. 그 순간을 함께 뛰었을 아이.
진짜 혼자 일어나서 본 아이였다. 와~ 새삼 아이가 신통했다. 얜 뭐지?
아이가 그랬다.
엄마. 아빠. 지고 안 지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과정이 중요하고 지금 이 순간이 나에겐 중요한 거예요.
후기
알고 보니 남편은 아이가 4시에 깨서 보는지 궁금해서 몰래 나가본 모양이다. (역시 아빠 ㅠ) 그리고 조용히 들어온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