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하고 내성적이었던 어린 시절. 대놓고 표현은 못해도 일기장에 선생님께 서운했던 내용을 적어서
나름대로 내 마음을 표현하던 아이였다.
친정엄마는 둘째 며느리셨지만 큰 며느리와 시어머님이 관계가 악화되면서 모든 제사와 시댁행사를 엄마께서 하셔야 했다. 큰 아버지와 사촌 언니, 오빠가 오면 할머니께서는 귀하게 여기시고 막내아들이었던
아빠, 엄마 그리고 우리들에게 그러지 않으셨다. 조용하고 얌전했던 나와 달리 에너지가 넘쳤던 여동생은
할머니께 유독 구박을 받았다.
엄마께서는 제사 전에 모든 장을 봐서 시골에 가셨고 홀로 음식을 만드셨다. 내 눈에 우리 엄마는 시어머님의 호통이 때론 겁나고 억울한 면들도 많아 보였다. 나는 엄마의 억울함과 속상함이 느껴져서 속으로 할머니에 대한
미운 감정도 순간순간 느꼈지만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없는 형편에도 부모님께서 할머니 용돈을 챙겨드리면 할머니께서는 그 돈을 사촌 오빠와 언니에게 주신 적이 있었고.. 엄마께서는 그게 몹시도 서운하셨다고 했다.
큰 엄마댁에 가시면 할머니께서는 불편하신지 꼭 우리 집에 오셨다. 지하방에서 따스한 물도 나오지 않는 곳에서 밤늦게까지 고단하게 일을 하고 오신 엄마께서는 할머니를 챙기시느라 고생을 하셨다.
몇 번 할머니께서 동생에게 뭐라고 하시는 모습에
언니인 나는 울컥했고..
어느 날엔 쌓였던 감정들이 올라왔다. 그날은 할 말은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중학생 때로 기억한다. 할머니께 또박또박 말을 했다.
"할머니께서는 우리 엄마가 혼자 음식도 다 차리고 애를 쓰시는데... 큰 엄마는 한 번도 안 오셔도
우리 가족보다 큰 아빠네 가족만 잘해주시고 언니, 오빠를 우리보다 예뻐하시는 거 같아요.
많이 서운하고 저도 예쁨 받고 싶었어요."
할머니는 놀라셔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셨다. 그런 적(차별) 없다고 하시면서 언니, 오빠는 엄마도 안 오고 하니까 챙긴 것뿐이라고 말씀하셨다. 오해하는 거라고 하시면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도 말은 명확하게 기억에 의존하여 말씀을 드렸다.
"지난번에 엄마, 아빠가 할머니 드린 용돈을 엄마, 아빠 보시는 앞에서 바로 언니, 오빠에게 주셨던 거 많이 섭섭했어요. 엄마, 아빠도 힘들게 버신 돈이에요. 우리에게 다정하게 안아주신 적도 없으셨는데 언니, 오빠에게는 손도 잡아주시고 쓰다듬어주시잖아요."
(울음이 터져도 이 날은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할머니께서는 기억이 잘 안 나셨는지 그런 적이 있었냐고 물으셨고...
나: "네. 저도 그 자리에서 봤어요. 그러셨어요. 저희에게는 따로 용돈을 주신 적도 없으시잖아요.
저희도 할머니 말씀 잘 들으려고 노력도 많이 하는데도 말이에요. 동생은 조금만 잘못해도 소리부터
지르실 때가 많으셨어요.
오빠랑 언니한테는 잘 웃으시고 다정하게 말씀하시잖아요."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우리가 큰 아빠네 보다 더 형편도 어렵고 엄마, 아빠께서 고생도 많이 하신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때부터 설움이 더 복받쳐서 많이 울었던 기억이 있다. 엄마께서는 놀라셔서 나를 달래셨지만 데리고
들어가시진 않았다.
늘 차갑게만 느껴졌던 할머니께서 내 손을 잡으시더니.. 자신의 속 이야기를 하시기 시작했다.
할머니: "내가 그랬다니 미안하다. 그렇게 느끼는지 할머니가 몰랐어. 너희 외할머니 보면서 내가 참 차갑고 냉정한 편이라고 느끼긴 했어. 할머니가 그래서 (너는) 많이 서운했구나. 너희가 덜 이쁘거나 그런 건 아닌데... 동생이 좀 얌전하지 않고 그런 편이잖니? 할머니가 혼자 살다 보니까 성격이 좀 그래. 다정하게 말을 못 하고..."
내 마음도 조금씩 누그러졌다. 할머니의 표정에서 미안해하시고 난감해하시는 모습이 보였다.
나: "할머니.. 동생이 여자치곤 좀 얌전하지 않지만 걔도 상처받아요. 할머니한테 혼만 나면 할머니가 자기 미워한다고 생각할 수 있고요. 조금만 다정하게 해 주시면 좋겠어요. 그리고 엄마, 아빠가 보는 앞에서 언니, 오빠한테 받은 그 봉투 그대로 주는 것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차라리 몰래 주세요."
할머니께서는 알겠다고 약속을 하셨다.
얼마 전... 엄마께서 나도 잊어버린 이 일화를 꺼내시면서 말씀하셨다.
엄마: "그때 우리 딸이 그렇게 바른말을 해서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할머니께서 니가 기억해서 다 말하니까 인정을 하시더라. 놀랐어. 그런 모습 처음 봤다. 할머니가 그 이후로 너는 좀 신경 쓰시더라.
말도 차갑게 안 하시고..."
나: "엄마. 나 그때 그래서 안 말렸던 거였어? 난 몰랐어. 엄마가 기분 좋아하는지도... 나.. 근데 그때 할머니께서 나한테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하셔서 그 이후론 할머니가 안 싫었어. 안 밉고... 할머니가 노력하시는 것도 느꼈고... 그래서 할머니 아프실 때도 할머니가 많이 가여웠어."
어린 나이에 시집오셔서 아이들 낳고 남편을 일찍 보내셨던 할머니... 중간에 귀도 어두워지셔서 잘 듣지 못하게 되셨다. 강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었을 할머니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냉정하고 무섭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살지 않았다면 5남매를 홀로 키우시기 쉽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 시대는 남편 없이 아이를 키우는 게 더 힘들었을 테고 귀도 잘 들리지 않게 되셨으니... 문득 할머니가 보고 싶은 날이다.
할머니도 사랑받고 싶으셨던 한 여자였고 사는 게 쉽지 않아 홀로 많이 많이 힘드셨겠지....
어쨌든 엄마는 마음속 한이 그날 조금은 풀어지셨다고 하셨다. 의도치 않게 효도를 한 셈이다.
할머니. 저 할머니가 그리워요. 그리고 그날 저의 마음을 이해해 주시고 노력해 주신 것도 너무 고마웠어요. 잘 계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