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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지문을 외우고 정확한 답을 외웠다.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취업에 성공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기억력을 놀랍게 향상시켰다. 더 이상 MBTI는 재미나 아이스 브레이킹 효과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는 검사 결과를 놓고 차별모드로 돌입된 지 오래되었고 부모들은 뱃속 아기가 공부를 잘하는 유형이길 바라는 마음에서 태어나자마자 모범생 MBTI를 만들기 위해 조기교육을 시켰다.
학교에서 반장이나 회장 후보가 될 MBTI 유형들이 예시로 나오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I 임을 속이기 위해 연기까지 배웠다. MBTI 도 유행이 있었다. 한동안은 계획적이고 차분한 성향의 ISTJ 유형의 신랑감이 우위를 차지했다가 틀에 박힌 회사원 스타일은 인기가 사그라들었다. 요즘에는 ENTJ나 ESTP 유형이 힙하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E를 키우기 위한 교육 프로그램과 사교 프로그램이 성행하기 시작했고 T 점수를 높이기 위한 독서클럽과 토론 앱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INFJ나 INTP 등 창의적이면서 지적 호기심이 높은 유형들은 연애나 결혼 정보 회사에서는 의외로 하위를 차지했다. 유일하게 이들을 좋아하는 분야는 교육과 과학 분야 연구소였다. ‘I를 E로 바꾸는 10가지 법칙’과 ‘당신은 사실 E’였다 등의 육아서나 자기 계발서들이 꾸준히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각종 방송에서는 ‘갱생 리얼리티 프로그램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ISFP나 INFP 유형들은 돌봄이나 상담 분야에서 조용히 활동하곤 했었는데 호구 취급 당하기 쉬운 유형이라는 영상들이 퍼지면서 갑자기 기피유형이 되었다. 부모들은 이 유형의 아이들에게 극기훈련을 보내거나 일부러 감정을 누르는 심리 훈련을 시켰다. 동물 농장을 보고도 우는 아이를 보면서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지 못할 나약함을 걱정했다.
이 사회에서 성공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인한 유형, 리더십, 자기표현 등이 점점 더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리더들의 MBTI 유형들의 세분화된 점수도 공개되면서 최근에는 각종 선거에서도 활용된 지 오래였다. 이들은 자신의 리더십 강한 MBTI 점수를 공개하면서 지지를 호소했다.
MBTI 물결에서 가장 고통받고 있는 연령은 어린아이들이었다. 부모와 궁합이 최하인 아이의 경우 ‘내 아이를 바꿔드립니다.’라는 코너에 나와서 상담과 솔루션을 제공받았다. 서로 교집합이 없으므로 손절이 답이라는 결론도 심심치 않게 내려졌다. 부모와 아이는 울면서도 그 처방에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였고 시청자들은 ‘어차피 부모도 남이다.’라고 하며 위로와 지지를 보냈다.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는 며느리의 MBTI 뿐 아니라 그들의 부모님 성향도 물었고 결혼 정보회사에서도 필수가 된 지 오래였다. 만약 거짓이 밝혀질 경우 파혼이 가능할 뿐 아니라 결혼 무효 소송에서도 승소할 확률이 높았다.
“쯧쯧. 저런 저런... 속일 것이 따로 있지. 어떻게 MBTI를 속이고 결혼을 할 생각을 했는지.. 쩝. 저런 인간은 매장을 시켜야지.” 뉴스에 나온 기사들에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고 악플이 달렸다. 각자 인증된 기관에서 다시 MBTI 검사를 받는 부부들이 늘어났다. MBTI 검사의 답을 외운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대안으로써 새로운 유형의 검사지가 등장했다.
담임선생님의 MBTI 유형을 꺼려서 아이의 전학을 결정하거나 반을 옮겨달라는 요구도 심심치 않게 나왔다. 짝꿍도 궁합이 안 맞는 유형들은 피했다. 학원 홈페이지에서도 선생님들의 프로필 옆에 MBTI 유형과 각자의 점수가 공개되었다.
유진은 항상 마음 한구석에 두려움이 있었다.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나면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떠날 것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서려 있었다. MBTI의 엠 자만 나와도 틱 증상이 시작되었고 식은땀이 흘렀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소설가라는 꿈이 있었다. 유일하게 그녀의 꿈을 가로막는 장벽은 자신은 I도 아니고 게다가 N도 아니라는 진실이었다.
어려서부터 I가 되기 위해 방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연습을 했었다. 타이머로 집콕 시간을 체크하며 철저하게 훈련했다. 친구를 만나서 놀고 싶어도 자신의 꿈을 위해 약속을 잡지 않으려 했다. 또 앞에 나가서 발표를 하고 싶어도 참기 위해 허벅지 밑에 손을 넣고 다리를 의자 다리에 묶기도 했었다.
자신이 왕 E 임이 들통나면 부모님의 사업을 물려받고 이어가야 했고 소설가의 꿈은 접을 수밖에 없게 될 테니까. S인 자신이 N이 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상상과 연결 등의 능력을 키우는 학원을 다녔고 판타지 능력을 키우기 위해 하루 종일 생각하는 훈련을 했다. 머리가 띵하고 멍해졌지만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훈련밖에 없었다. 타고난 재능이 없을 경우 키워진 노력으로 커버해야 했다.
이에 반해 동생은 타고나길 INFP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글쓰기에 두각을 나타냈다. 환상 속에 사는 아이처럼 공상하길 좋아했고 그녀가 대충 갈겨써놓은 글은 유진에겐 넘사벽이었고 동생의 재능은 유진의 질투 대상이었다. 유진은 동생과 달리 세상을 오감으로 느끼고 보이는 이면으로만 바라보는 자신이, 단순하게 생각하는 스스로가 싫었다.
아무리 연상작용과 발상 훈련을 해도 별다른 진보가 없자 인터넷 사이트에서 N을 높여준다는 약을 검색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정부에서 약의 중독성으로 인해 약물을 금지하게 되었지만 암암리에 공급되고 있었고 효과를 봤다는 사람들 후기도 있었다.
[MBTI 검사에 큰 오류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 오류의 심각성은 그동안의 검사 결과를 모두 뒤엎어버릴 수도 있는 결정적인...]
기사는 어느 날 갑자기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아무 말도 못 했고 쓰러지는 사람들도 속출했다. 모두 입을 틀어막고 충격에 빠졌다. MBTI 검사로 인해 자신의 인생이 망하게 되었다는 사람, 꿈을 잃고 이혼을 당했다는 사람, 퇴출당한 경험 등을 이야기하며 격한 반응들을 보였다.
가장 먼저 문을 닫는 건 관련 학원들이었다. 학원이 문을 닫는 것을 시작으로 하루아침에 세상이 혼란 상황에 이르렀고 경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각종 음모론을 시작으로 거대한 힘의 존재가 있다는 주장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태를 막지 못한 정부가 욕을 먹으면서 탄핵 발언으로 이어졌다. 가는 공터마다 시위와 난동이 이어졌다.
급기야 대통령이 직접 대국민 사과를 하기에 이르렀다. 무릎까지 꿇은 대통령은 참담한 심정으로 사과문을 읽어나갔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국가의 혼란과 불안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죄송스러운 말씀을 먼저 전해드립니다. 지금 정부는 온 힘을 다해 더 정확한 MBTI 검사지를 만드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외국 전문 임상심리 교수진들도 들어와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신뢰할 수 있고 관련 논문들로 뒷받침 가능한 결과물을 만들어낼 것을 약속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사람들의 분노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지만 뾰족한 수가 없는 상황이므로 기다리자는 의견들이 공론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변화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아이들 얼굴에서 웃음이 번지고 서로 편을 갈라서 놀지 못하게 하던 부모들도 친구 관계에 손을 놓게 되었다. 아이들은 자신의 MBTI 성향에 따른 정해진 직업이 아니라 자기가 관심 있는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다.
또 자신과 다른 성향의 사람들을 만나서 갈등과 싸움을 하며 클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결혼 상대자도 제한된 유형에서 골라야 했었지만 지금은 끌리는 반대 성향의 사람들과 연애하는 모험과 스릴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생각보다 이혼율은 큰 차이가 없었다. 사람들은 점점 정부가 만들고 있는 진짜 MBTI 검사에 관심이 적어지더니 무효화시키자는 의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투표에 붙여졌다. 결과를 기다리는 시민들은 떨렸고 간절했다.
[국민 여러분 투표 결과는 97 대 3으로 무효화하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투표 결과를 발표하는 뉴스 앵커도 눈물로 범벅이 되어 충혈된 눈으로 소리 지르며 기뻐했고 여기저기서 2002 월드컵 축제가 재현된 듯 기뻐 날뛰는 사람들로 광화문 광장과 체육관들에 가득 찼다. 거리로 뛰어나온 사람들로 인해 도로가 마비되었다.
물론 MBTI 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다만 그 용도가 초창기처럼 재미를 위해서나 서로 어색함을 풀기 위한 도구로 사용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유진은 웹 소설 작가가 되었고 그녀의 작품은 드라마로 제작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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