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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민 Feb 12. 2022

정동계 이야기

우리 고을의 옛이야기 <옛이야기 속으로>

옛날 거창군 위천면 역동에 진사 정유명이 살았다. 정유명에게는 정동계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길현에 있는 서당에 다녔으며, 글공부가 넉넉하였다. 그러나 그는 열일곱 살에 마마를 앓아 얼굴이 얽어서 미남이 아니었고, 가세도 넉넉지 못하였다.

한편 정동계가 살던 역동에서 남쪽으로 십 리 남짓한 영승에는 충의위 윤할이라는 만석 거부가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윤만석이라 불렀다. 그에게는 혼기가 찬 딸이 있었는데 백방으로 수소문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윤만석은 길현의 서당에 많은 수재들이 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윤만석은 곧 사람을 보내어 그 서당의 훈장과 총각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정동계도 윤만석의 집에 초대받아 가게 되었다. 초청을 받은 총각들은 각기 의복을 단정히 하고 언동을 각별히 조심하였다. 간단한 인사가 끝날 무렵에 빨간 앵도와 호박색 꿀이 푸짐하게 놓인 상이 나왔다. 모처럼 귀한 음식을 본 총각들은 한 입에 삼키고 싶었으나 주인이 점잖게 앉아 있는지라 조심스럽게 앵도를 한알 한알 꿀에 찍어 먹었다.     

그런데 정동계는 접시에다 꿀과 앵도를 가득담아 한 입씩 먹는 것이었다. 이렇게 실속있게 음식을 먹는 것을 본 윤만석은 그의 의젓한 언동과 평소 정진사의 덕망 등을 고려한 끝에 동계를 사위감으로 내정하고 안으로 들어가 부인의 의향을 물었다. 그러나 부인의 의사는 정동계의 음식 먹는 태도가 게걸스럽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곰보인데다가 가난뱅이였기 때문에 사위삼기가 싫었다. 그러나 윤만석은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열아홉 살의 동계를 사위로 삼았다.     

혼례를 치른 동계는 화촉이 밝혀진 신방에서 아름다운 윤규수와 초면상을 받았다. 그러나 신랑은 진수성찬을 앞에 놓고도 저를 들지 않았다. 그러자 신부가 잔을 권하며 음식을 먹지 않는 까닭을 물었다. 망설이던 끝에 신랑은 난생 처음 보는 진귀한 음식을 대하니 어머니 생각이 나서 먹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신부는 종이를 펴놓고 봉개를 쌌다. 그래도 신랑이 무언가 미흡해 하자 신부가 조심스럽게 까닭을 물으니, 신랑은 그 봉개를 어머니께 가서 드리고 와야 마음 편하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신랑의 효성에 감동한 신부는 책 속에 봉개를 감추어서 대문 밖까지 전송하여 주었다.     

동계는 십 리 길을 단숨에 뛰어가 어머니를 뵈었다. 동계를 본 어머니는 신방을 비워 두고 온 그를 꾸짖어 곧 돌려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동계는 기어이 봉개를 펴서 어머니 앞에 내어놓고는 어머니가 드시는 것을 보아야만 돌아가 신방을 치르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동계의 뜻을 따랐다.     

신혼 시절에 동계는 장모로부터 푸대접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선을 볼 때부터 장모의 마음에 차지 않은데다가 여러 사위들 중에서 오직 그만이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윤만석의 집에는 큰 대추나무가 있어서 가을이면 많은 대추를 거두어 사위들을 대접했는데, 장모는 그 중 작은 것만 골라 동계에게 주었다. 또 한 번은 처갓집 대문채를 새로 짓는데 동계가 일산대가 드나들 수 있게 높이 지으라고 말했다가 장모와 여러 동기들로부터 핀잔을 듣기도 했다. 결국 동계의 말대로 장인이 대문채를 높게 지었는데 뒷날 동계가 경상감사가 되어 일산을 받고 오니 장인이 즉시 대문을 열어 일산을 맞았다.

한편 동계는 경상감사가 된 후 윤만석에 있는 대추나무룰 베어버리게 하였는데, 그 뒤로부터 영승에는 대추가 열리지 않는다고 한다.

-1997년 경남 방문의 해, 경남 전설을 찾아서, 경남농협, 거창편, 27~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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