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민 Mar 21. 2021

남해 양아리 석각의 수수께끼

3. 고조선 문자설  <내가 읽은 책과 세상>

문치웅은 문자적 측면과 환단사적 측면에서 의문의 석각이 지닌 비밀을 밝히고자 했다. 그는 전국 시대의 과두문, 은나라 시대의 갑골문, 주나라 선왕 때의 주문 등 고문의 존재를 전제하고, 기원전 2,284년 <삼일신고>의 원전에 “보고”를 붉은 옥돌에 전서로 새겼다는 기록을 들어 고조선에도 고문이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이때의 전서는 이사가 정리한 소전이라기보다 주문이라 불리는 대전에 가까웠을 것이라는 견해다.


그는 또 이맥의 태백일사를 들어 남해 양아리 석각은 고조선의 문자라는 주장에 힘을 보탠다. 이맥은 조선 중기 중종 때의 문신이었으며, 학계에서는 아직 인정하고 있지 않으나 태백일사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태백일사>는 삼신오제본기에서부터 한국본기 신시본기에 이어서 고려국본기까지 우리 고대사 전체를 서술한 사서인데, 이암이 저술한 단군조선 부분만 빠져있다. 이를 미루어볼 때, 이맥의 저작활동은 고조부인 <단군세기>의 저자 행촌 이암의 유훈을 받드는 일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이는 이맥의 후손 이기가 1911년 계연수가 한단고기를 편찬할 때 감수를 맡았을 만큼 고성이씨의 가문은 민족의 자존적 역사에 지대한 사명감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편은 <대변설>의 주를 인용하여 남해 양아리 석각의 내용을 “환웅출렵치제삼신(桓雄出獵致祭三神)”으로 해석하여 기록하고 있다. 풀이해 보면 “환웅이 사냥하던 곳에서 치제를 삼신(단군왕검)이 지냈다.”라는 내용이다. 또 석각의 위치에 대해서도 “남해현 랑하리의 골짜기 바위 위에 있는 것은 신시에서 옛날에 새긴 것(南海縣郞河里之溪谷岩上有神市古刻)”이라고 전하고 있다. 여기서 “신시”는 단군왕검이 조선을 건국하여 도읍을 아사달이라 부르기 전의 이름이니, “신시고각”이라고 함은 단군왕검 시절에 새긴 것이라는 주장이 된다.

하지만 이 주장 역시 논리적인 허점을 여럿 보여주고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첫째, 고조선 문자설의 핵심 논거로 지목된 <태백일사>가 아직까지 학계로부터 진서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고, 둘째, <태백일사>를 비롯한 민족역사서들이 민족정기를 드높이려는 몇몇 지사들의 의지에 따른 저술(야사)로서 그 내용이 역사적 사실임을 담보해주는 다른 증거들이 거의 전무한 상태이며, 셋째, 남해 양아리 석각을 문자로 보고 이를 한자로 대치하는 과정에 있어서 자의적이며 연역적인 해석이 너무 많이 개입되어 있다. 넷째, 위치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지명인 낭하리(郞河里)와 양아리(良阿里)에 차이가 크고, 다섯째, 중국문자설에서도 석질의 풍화상태를 들어 2,200년을 견딘 흔적으로 보기 어렵다고 했듯이, 4,300년을 오롯이 견뎌낸 것으로 보기에는 유물의 상태가 너무도 선명하며, 여섯째, 하단부에 새겨진 “천(天)”자가 가리키는 속뜻이 무엇이냐는 점에 대하여 명료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하늘제사를 지낸 것을 나타낸 것이라면 존귀한 하늘을 하단부에 새겼을 리가 없고, 글자의 크기 또한 그렇게 작게 새겼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계속>




* 고조선 문자설은 “고대문화설”의 한 갈래로서, 1999년 10월 2일 <KBS역사 스페셜> ‘추적 환단고기열풍’에서 ‘남해상주리석각은 우리나라 고대문자인 녹도문 또는 가림토문일 가능성을 시사했다.








                                              






















작가의 이전글 남해 양아리 석각의 수수께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