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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민 Mar 21. 2021

남해 양아리 석각의 수수께끼

4. 별자리설 <내가 읽은 책과 세상>

남해 양아리 석각이 중국문자도 아니요 조선문자도 아니라는 점은 그 주장들이 지닌 허점에서 잘 드러나 있다. 중등학교 교사로 퇴직한 조세원은 이들 주장이 지닌 한계를 강조하면서 의문의 석각은 가을 밤하늘을 새겨놓은 성좌도가 틀림없다고 역설한다.


그는 기원전 2,500년경 혹은 그 이전부터 한반도의 고인돌, 석벽 등에 별자리를 새겨왔고, 고구려, 고려, 조선에 이르러 무덤의 벽과 천장에도 사방신을 비롯한 별자리들을 그려왔음을 전제하고, 많은 역사적 사료들을 제시한다.


그는 화강암에 확을 쪼아 홈으로 ‘갈아 닦기’를 하여 새겼다고 주장한다. 새긴 별자리만 해도 25수가 넘고 하단의 ‘天’이 병각되어 있으며, 북극성을 축으로 하는 수직수평 방향의 표시(ㅗ)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문자가 아니라 밤하늘의 별자리를 새긴 천문도(성좌도)라는 것이다. 천문도는 1/4에 해당하는 부채꼴의 가을 성좌도이며 연관이 있는 암각으로 벽련리 양지암각의 성좌도와 사천시청 앞 지석묘의 모형과 방위 표시, 신흥리 화전바위의 성좌도(페르세우스 별자리)를 보기로 들었다.

가을철 별자리 그림인 남해 양아리 석각은 국제천문연맹에서 정한 별자리와 대부분 일치하는 삼별초군의 대몽항쟁 시기의 성좌도이다. 조선조 천상열차분야지도와는 다른 일면이 있긴 하나 성수의 위치와 부분적 성좌도가 자세히 일치하는 것은 쉽게 비교할 수 있다. 해당 석각의 성좌도는 북극성을 축으로 페르세우스자리, 안드로메다자리, 카시오페아자리, 삼각형자리, 페가수스자리, 조랑말자리, 백조자리, 도마뱀자리, 세페우스자리, 돌고래자리, 작은곰자리와 성좌도 일부의 양자리, 염소자리, 물고기자리, 현미경자리, 물병자리에 이르며 가을하늘의 전면을 보여준다.


또한 석각의 왼쪽에 새겨진 글은 “오른쪽 그림은 하늘을 뜻하며 10월 10일부터 10월 18일까지는 별자리를 관측하기에 좋은 때이다. 김민성 공이 그리고, 최금지 석장수가 새겼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한편 고려 말 삼별초군의 항쟁(1270~1272년)이 제주, 진도, 남해, 창선, 마산, 김해, 거제 등지를 요새화했던 것으로 볼 때 이 석각이 삼별초군이 남긴 흔적일 가능성이 크다.


최근 학계가 밝히는 삼별초의 루트는 제주도를 지나 오키나와(유구)까지 *확장되고 있는 추세다. 말하자면 삼별초의 루트가 공교롭게도 설화 속의 서복경로와 합치된다는 말이다. 이 석각의 주인공이 서복이라고 우기기에는 세월이 이 바위 앞에서만큼은 눈을 감았다고 해야 할 지경이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비는 장수왕 2년 서기 414년에 세웠고 1775자를 새겼지만 지금은 이미 150여자가 훼손된 상태이고, 남해 노량 충렬사 입구에 있는 자암김구선생적려유허추모비는 영조42년 서기 1766년에 세웠지만 벌써 2자가 비바람에 씻기어 없어졌다. 서불과차설에 따르자면 서복은 기원전 210년경 사람이 되니 석각은 2,200살이란 말이 된다. 그런데 이토록 선명하게 남아있을 수 있단 말인가?


성좌도를 그릴 때 점으로 찍는 방식의 성혈도와 선으로 그어 그리는 성좌도의 기점과 그 차이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신석기 사람들은 고인돌 위에 별자리를 새길 경우에는 점으로 찍고 있지만 선으로 이어 그리지는 않았다. 우리는 별자리를 그릴 때 언제부터 선으로 별과 별을 이어가며 그리게 되었을까? 선으로 그린 성좌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가 조선 초기부터 석각본, 목판본, 필사본 등으로 제작, 보급되었다. 칼 루퍼스는 1913년에 이 천문도가 고구려 시대에 제작된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이후 1934년에 발간된 경성부사에서는 고려의 천문도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건성이라는 별이름을 왕건의 이름을 피휘해 입성이라 표기함)고 밝히고 있으니, 선으로 그려진 남해 양아리 석각을 새긴 해가 1270년으로 소급된다는 주장에는  논리적 모순이 없을 듯하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성좌도설 또한 몇 가지 한계를 뛰어넘어야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첫째, 후세에 부가적으로 새긴 흔적이라 볼 수도 있는 기록을 논거로 들고 있다는 지적이다. “天”과 더불어 “右畵十月十日十月十八日吉辰, 金敏成公圖崔金志石匠手” 글귀는 다른 부분과 필체가 전혀 다르고 훨씬 날카로운 것으로 새긴 느낌이 있어, 이 부분만큼은 후세에 부가적으로 새긴 것이 아니냐는 의심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 반박은 조세원이 자신의 핵심 논거로 들었던 “天”이 훗날 누군가가 하늘의 성좌도라고 해석한 결과라는 것이다. 둘째, 이 석각이 삼별초군이 새겼다는 명확한 다른 증거가 없으니, 이 또한 추정일 뿐이다. 셋째, 삼별초군이 별자리와 관련된 어떤 믿음, 예컨대 도교사상에 의지했다든가 하는 등의 증거가 나와야 주장에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인데, 아직 그런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계속>



*   아케다 요시후미 류큐대 고고학 교수는 1273년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고려기와가 오키나와에서 발굴된 점에 대하여 “한반도, 일본과 같은 곳에서 사람들이 많이 건너오면서 오키나와 사회가 변화를 겪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삼별초 사람들이 오키나와로 건너와 오키나와 사회변동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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