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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민 Mar 16. 2022

귀신 바위 이야기

우리 고을의 옛이야기 <옛이야기 속으로>

마리면 소재지로부터 서북쪽으로 오 리쯤에 배암골이라고 부르는 사동마을이 있다. 사동에서 북쪽 황새골 쪽을 바라보면 검게 그을린 모양을 한 바위가 하나 있다. 사람들은 그 바위를 귀신 바위라고 부른다. 이 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옛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밤이면 이 바위에서 구슬프고 처량한 피리 소리가 주변의 산골짜기에 은은히 울려 퍼져 듣는 이들을 사로잡았다. 이 피리 소리에 넋을 잃고 피리 소리가 나는 쪽으로 끌리어 간 사람은 다음날 이 바위 밑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그래 이곳 사람들은 비가 오는 밤이면 불을 끄고 잠을 청하기가 일쑤였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멋도 모르고 이곳을 지나다가 피리 소리에 끌려갔다가는 영락없이 죽고 말았다.      

어쩌다가 담이 크다고 자부하는 젊은이들 가운데는 귀신의 정체를 밝혀 보겠다고 큰소리치며 그 바위 근처에 가는 사람도 더러 있었지만, 그 또한 별수 없이 저승차사에게 잡혀가는 몸이 되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이 마을 지나던 한 젊은이가 그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까닭이 궁금해진 젊은이는 마을에 머물면서 비가 오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비가 오자 젊은이는 그 날밤 칼을 한 자루 몸에 지니고 바깥으로 나섰다. 과연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빗속을 타고 애간장을 끊어내는 듯한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피리 소리에 끌리는 자신을 발견한 젊은이는 마음을 단단히 추스르고 바위 가까이 다가갔다.     

어둠을 뚫고 음산한 빗속을 더듬으며 젊은이가 바위 가까이 다가가자 그때까지 들려오던 피리 소리가 뚝 그치더니 주위는 고요한 적막에 휩싸였다. 젊은이는 눈을 똑바로 뜨고 바위를 뚫어지게 응시하였다. 그러자 잠시 후 바위에서 흰 연기 비슷한 것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더니 그 속에서 거대한 구렁이 모습을 드러냈다. 구렁이는 금방이라도 젊은이를 집어삼킬 듯이 노려보았다. 젊은이는 무서워 뼛골이 으스러지는 것 같았으나 온몸의 혼기를 가다듬고서는 큰 소리로 구렁이를 향하여 꾸짖었다.     

“요사스런 미물이 어찌하여 사람들을 현혹하여 죽게 만드느냐? 그 요사한 짓을 그치지 않고 계속하겠다면 내 이 칼로 너의 몸둥이를 천동강이 만동강이로 내어버리겠다.”     

구렁이가 힘없이 머리를 숙이고는 차분히 말하였다.     

“제가 사람들을 죽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저의 겉모습을 보고는 혼절하여 죽은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너는 피리를 불어 많은 사람을 이곳으로 끌어들여 죽게 하였느냐?”

“예, 그것은 저에게 너무나도 원통하고 억울한 사연이 있기에 그 사연을 알리어 원한에 사무친 저의 소원을 풀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럼 너의 원통한 사연은 어떤 것이며 너의 소원은 무엇이냐?”

“오늘 비로소 제 억울한 사연을 이야기할 수 있는 은인을 만난 것 같습니다. 저의 원통한 사연을 소상히 말씀드릴 테니 명심하셔서 날이 밝거든 꼭 저의 원한을 풀어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저 건너 마을 진사댁 딸이옵니다. 소녀의 집에 머슴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힘이 세어서 일을 잘할 뿐만 아니라 외모 또한 믿음직스러워서 소녀는 어릴 때부터 그를 잘 따랐습니다. 머슴도 제가 부탁하는 일이면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만사를 제쳐두고 들어주었지요. 제가 귀찮게 굴지라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응석이나 투정을 부려도 모두 잘 받아 주었답니다. 비록 천한 신분이지만 저는 머슴을 친 오라비처럼 여기고 흉허물없이 대하였습니다.     

그러다 작년에 돌림병이 돌아 저의 부모님이 한꺼번에 돌아가시고 천애 고아가 된 제가 집의 어른이 되어 집안을 돌보며 지키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기에 저는 더더욱 그 머슴을 믿고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집안의 농사일에서부터 대소사의 모든 일을 머슴과 상의하여 처리하였지요. 물론 친척들은 혼기에 찬 저에게 마땅한 혼처를 물색하여 결혼하라고 했지만 부모님의 삼년상을 마치지 못하였기에 혼례를 올리지 못하고 망설이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도기 석 달 전 어느 날 밤 문을 잠그고 잠을 자고 있던 방에 머슴이 찾아와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래 문을 열고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머슴은 대답도 하지 않고 제 방에 그대로 들어왔습니다. 저는 너무나 급작스러운 일이라 몹시 당황했으나 곧 정신을 수습하여 그의 무례한 행동을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머슴은 다짜고짜 저의 입을 틀어막고는 필사적으로 반항하는 저의 몸을 더럽히고 말았습니다. 저는 너무나 기가 막히고 원통한 일을 당했기에 한동안 넋이 나가 문 바깥출입을 삼가고 음식도 먹지 않은 채 부모님의 삼년상이 끝나면 죽기로 결심하고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생활하였습니다.     

그러나 달이 지나자 저의 몸에는 변화가 생겼습니다. 임신이 되었던 것입니다. 임신한 것을 안 저는 고민 끝에 부모님과 문중을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자결을 하고 나자 머슴은 제가 자살한 이유가 마을에 알려질까 두려워하여 저를 항아리에 넣어 밤중에 이곳으로 와서 바위 밑에 묻었습니다. 내일 아침 은인께서 이 바위 밑을 파보시면 큰 항아리가 나올 것입니다. 그 항아리 속에 든 저의 시신을 꺼내어 장례를 치러 주시고 아울러 그 머슴의 잘못도 다스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긴 이야기를 마친 구렁이는 눈물을 주루룩 흘리며 젊은이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연기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구렁이의 이야기를 듣고 난 젊은이는 구렁이가 사라진 줄도 모르고 한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발걸음을 돌려 마을로 돌아왔다.     

젊은이가 마을로 돌아왔을 때는 벌써 새벽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젊은이가 다른 사람들처럼 죽었다고 믿고는 젊은이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젊은이가 나타나자 귀신을 만난 듯 기겁을 하고 물러섰다. 그러나 젊은이가 살아서 돌아온 것임을 알고서는 귀신을 죽이고 온 줄로 생각하고 환호성을 올리며 기뻐하였다.     

날이 밝자 젊은이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바위 밑으로 가서 땅을 파보았다. 그랬더니 과연 거기에서 큰 항아리가 나왔고 그 항아리 속에는 아직도 살아 있는 듯한 처녀의 시신이 담겨 있었다. 젊은이는 놀라서 주저하는 마을 사람들을 달래어 관에다 처녀의 시신을 넣고 건넌 마을의 진사댁으로 갔다. 그리고는 그 마을 사람들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진사댁 머슴을 잡아들여 꿇어 앉히고 치죄하였더니 과연 구렁이의 말과 다름없는 사실을 실토했다. 그래서 처녀의 관 앞에서 머슴의 목을 쳐죽이고 처녀를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부터 사람들은 그 바위를 귀신 바위라 불렀다고 하며, 바위에서도 다시는 피리 소리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 1997년 경남 방문의 해, 경남 전설을 찾아서, 거창편, 46~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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