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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민 May 01. 2022

혼례3

한국 문화의 원형을 찾아서 <내가 읽은 책과 세상>

시집가다     

 ‘시집가다’는 취가혼(聚嫁婚), 시집살이, 민며느리제, 친가 문화 따위와 매우 친밀한 관계에서 쓰이는 말이다.  ‘시집가다’는 신부의 관점에 쓰던 말이며, 제도적으로는 남성 중심의 사회제도에서 생겨난 것이다. 남자가 처가살이를 벗어난 것이 불과 300여 년 전이니, 이전에는 ‘장가들다’가 있을 뿐이었다.  

    

  동서양 대부분의 나라가 부계 씨족 사회를 거쳐 중앙집권적 봉건국가 체제로써 남성 위주의 혼인 문화를 발전시켜 갔음에도 우리나라는 모계를 중시하는 혼인풍습을 오랫동안 간직해 온 것이다. 남귀여가 혼례풍속은 고대 삼국시대, 고려 시대, 조선 초기 동안 우리 민족의 일반적인 혼례문화로 자리 잡혀 있었다. 그러나 고려 말기 공민왕은 문란해진 왕권 강화를 위해 개혁 방안의 필요성을 제기했으며 이는 이제현, 이색, 정몽주 등에 의해 신분제도와 가부장제적 종법제도의 합리화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주자학을 도입하게 된다.    

  

  고려의 뒤를 잇는 조선왕조도 중앙집권적 왕권 강화를 위해 정치적 개혁 방안을 마련하였으며 문물제도 정비에 노력하게 된다. 과전제와 노비 변정을 실시하였고,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했으며, 가묘제를 도입하고 호적제를 개혁하여 호패법을 실시하는 등 사회, 경제, 문화의 개혁시책과 함께 상복제를 개정하고 동성혼을 금지하며 과부의 재혼을 막고 첩의 자식의 신분적 지위를 제한하는 등 가족제도와 관련한 풍습이 전면적으로 정비되었다. 이 과정에서 가족제도의 개정을 위해 논의된 것이 "주자가례"의 "친영론"이다. 친영론은 "여자가 남자 집으로 시집을 와서 사는 것"으로 혼례 장소와 혼례 후 두 집안 간의 지위에 따른 문제이다. 즉, 조선 초기 논쟁의 요점은 재래의 남귀여가(서류부가)혼례 풍속을 친영(우귀)혼속으로 바꾸자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단순히 혼례절차의 변경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개혁에 대한 개혁파들의 정책의 단면이라 하겠다.      

 조선 초기 개혁파 공신인 정도전, 권근 등에 의해 친영론은 적극적으로 지지를 받았으나 가부장권에 의한 재산의 상속과 제사권의 상속이 사회적 이해관계로 걸려 있는 친영론은 일반 사대부들의 소극적 태도에 의해 사회 전반적으로 보급되지는 못하였고, 일반 대중은 이를 따르지도 않았다. 결국 환영받지도 못한 채 잊혀간 것이다. 그 후 친영론 제기 시점부터 중종 때까지 약 100년간은 친영론이 사대부 지배계급의 냉대를 받았으나, 15세기 말 16세기 초 성종과 중종의 시기를 거치면서 사림파 양반과 훈구파 양반 간에 친영론이 정권 쟁탈전의 중요한 논쟁이 되어 중종 때 조광조 일파에게 사화의 참극까지 빚어지는 사태를 불러일으킨다.     

 

  그 후, 중종 때인 1512년 7월 중종 자신이 태평관에서 제2비를 친영례로 맞이하는 실행까지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대부 가정과 일반 민간에서는 친영을 실시하지 않았고, 이 시기에 편찬된 예서에서도 친영례를 얘기하고 있으나 실행한 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결국 명종(1546-1567) 때 재래의 남귀여가 혼속과 친영을 절충한 "반친영" 움직임이 일어나 "예식은 처가(여가)에서 거행하지만, 여가의 체류 기간을 줄여 삼 일만에 친영 의례를 거행하는 이른바 "반친영" 의례를 치렀으며 이는 문정공 조식이 주자가례 원형대로 친영례를 실행하기 어려운 우리나라의 형편을 헤아려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사대부의 혼례풍속은 주자가례를 좇되 반친영을 거행하는 여가를 존중하고 현실적 상황을 고려하는 아름답고 현실적인 독특한 혼례풍속이라 하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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