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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민 Apr 24. 2022

혼례2

한국 문화의 원형을 찾아서 <내가 읽은 책과 세상>

장가들다


  ‘장가들다’는 초서혼(招壻婚), 처가살이, 데릴사위제, 외가 문화 따위와 긴밀한 관계에 있는 말이다. 시집은 간다고 하는데 왜 장가는 든다고 할까? 시집은 한번 가면 나오지 않는 곳이니 가는 것이라고 하고, 장가는 내 집 아닌 장인의 집에 가는 것이니 잠시 들르는 것이다. 따라서 장가는 간다고 하지 않고 든다고 말하는 터이다. 그럼 들른 장가를 나와서는 어디로 가야 한다는 말인가? 조선 시대만 하더라도 장가를 나와서는 대개 시집으로 들어갔다. 남성의 입장에서 보면 부모의 집으로 들어간 셈이다. 그러나 조선은 유교의 가르침에 따르던  나라였기에 대개의 경우 양반들만 그랬고, 조선의 평민이나 고려만 하더라도 장가를 나와서는 그들만의 살림을 차리는 것이 통례였다. 신랑의 부모 집, 즉 시집으로 들어가 살기보다는 부부 둘만의 집을 새로 짓거나 남의 집을 빌려서 부모에게서 따로 떨어져  살림을 나는 것이다. 이것을 ‘제금난다’고 말해왔다.  

   

  조선 중기 대학자로서 경상좌도에 퇴계가 있었다면, 경상우도에는 남명이 있었다. 남명은 외가 집터의 정기를 타고 나는 바람에 장성하여 큰 인물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남명의 부모가 그 집에 와가는데, 누런 용 한 마리가 방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남명이 태어날 때 집 앞 우물에서 무지개가 솟아오르고 방안에는 찬란한 보랏빛 광채가 가득했다고 한다. 남명의 외조부는 그의 울음소리를 듣고 직접 미역국을 끓이며, 훌륭한 인물이 친손자 가운데서 나지 않고 조씨 집안에서 났음을 못내 아쉬웠다고 한다.


  남명은 스물두 살 때 충순위 조수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처가는 남평 조씨로 대대로 김해에서 살아온 지주여서 가산이 매우 넉넉했는데, 당시는 부모가 재산을 물려줄 때, 아들딸 구별하지 않고 균등하게 분배하는 것이 통습이었다. 그래서 김해에 남명 몫의 재산이 있었다. 스물네 살 되는 해 김해 신어산 아래 탄동에 ‘산해정’이라는 정자를 지어 학문에 정진하였다고 하니, 처가의 넉넉한 살림이 남명을 대학자로 만드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남명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집안이 늘 가난하여 책 한 권 사보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보면 이 점은 더욱 명약하다.


  흔히 경상도는 사대부라 할지라도 처가살이를 하지 않은 남자가 없었을 정도라고 한다. 시대가 비록 남성 지배 이데올로기가 최고조에 이르렀던 조선 중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조선은 유교를 표방하는 남성 지배 이데올로기의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유학이 가장 성행했다고 볼 수 있는 조선 중기 때마저도 여성 중심의 문화라고 볼 수 있는 처가살이와 외가 문화가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서민이 아닌 지배 귀족인 사대부, 그것도 대 유학자의 경우에서 말이다. 이것은 처가살이와 외가 문화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닐뿐더러 그 뿌리가 매우 깊은 것임을 잘 보여준다.     

 

  조선은 고려에 반하여 여러 가지 제도 등을 거슬러 일어난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적, 본질적으로는 고려의 문화를 이어받은 것이 적지 않았다. 또한 고려는 비록 고구려의 정신을 잇겠다는 국책에도 불구하고 묘청의 거사가 실패함에 따라 나라의 거의 모든 문물이 신라를 답습하게 된 나라였으니, 결국 통일신라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나라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다. 조선의 처가살이와 외가 문화는 궁극적으로는 신라나 가야의 남방문화, 농경문화의 흔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라오스는 지금도 남자가 장가를 들면 7년 처가살이를 하면서 노동력을 제공해야 한다고 하니, 일손이 부족한 농경사회의 데릴사위 풍습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 초기에는 사대부의 70%가 처가살이를 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자녀 균분 상속, 윤회 봉사든 분할 봉사든 제사도 아들딸이 똑같이 모셨으며, 호적엔 아들딸 구분 없이 출생 순으로 등재되었다. 이는 모두 고려 제도의 답습이라 할 수 있으니 고려야말로 양성평등을 지향하는 나라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대부터 이천여 년을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 속에서 처가 식구들의 눈치를 보며 살아왔다. 13세기 초, 문인으로 유명한 이규보(李奎報)의 장인 애도문에 보면 “처가에 얹혀살게 되니 처부모의 은혜가 친부모와 같다.”는 기록이 있고, 2세기 정도 뒤인 1415년 [태종실록] 권 29에 혼인풍습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고려 시대의 옛 풍습에 따르면 혼인 의례가 남귀여가(男歸女家)하고 아들의 손자까지도 외가에서 출생하여 성장하게 되므로 외가 친척을 더욱 은혜롭게 생각한다.” 남귀여가혼은 고대 삼국시대, 고려 시대, 조선 초기까지 존속하던 우리 겨레의 전통 혼인풍습이었다. 또 “남귀여가” 혼인풍속은 고대로부터 전하여 내려온 우리 민족 고유의 혼인풍속이라고 생각되는데, 기록상에서는 그 풍속이 고구려의 서옥제(壻屋制)에서 기원했다고 적혀있다. 서옥이란 사위집이라는 뜻인데, 여자의 부모가 자기 집에 서옥(壻屋)이라는 신혼집, 혹은 신혼방을 꾸려놓고, 자기 딸과 사위를 혼인시켜 살게 하였다, 그들이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어느 정도 성장한 다음에야 비로소 자기 딸이 재롱을 피우는 아이를 업고, 자기 신랑을 따라 시집에 가서 살도록 허락하는 장가(丈家) 주도의 혼인제도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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