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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민 May 06. 2022

혼례4

한국 문화의 원형을 찾아서 <내가 읽은 책과 세상>

장가드는 조선과 시집가는 중국     

  현대를 사는 우리가 전통 혼례라고 할 때, 그 전통 혼례는 도대체 어느 시대의 것을 말하는 것일까? 대개 사람들은 은연중에 조선을 떠올린다. 하지만 풍습이나 문화라는 것은 정치적 권력에 따라 쉬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다. 조선의 풍습은 고려에서 연연히 이어졌고, 고려의 문화는 신라에서 온 것이 많다. 어느 국문학자는 우리의 전통 혼례는 고조선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태조실록에도 별들에게 제사를 바치는 초례제에서 혼례(초례)가 유래했다는 기록이 있다. 혼례절차가 도교의 초제 절차와 닮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려 말기부터 주자학을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비롯하면서 도교 중심이던 혼례에도 변화가 일게 된다. 도교적 성격이 강했던 초례는 양성평등의 습속이 다분했으나, 주자학은 오로지 남성이 주도해야 함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먼저 갈등이 일어났던 곳이 사회지도층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왕족들의 혼례를 두고서는 가장 큰 풍파가 일기 시작했다. 마침내는 전통적으로 답습하던 초례에다 신랑 주도의 ‘친영’ 예식을 곁들이는 것으로 봉합하는 데에 이르렀다. 그러나 왕족의 ‘반친영’혼례가 법제화된 이후에도 오랜동안 평민들은 도교 중심의 전통 초례풍습을 이어온 것으로 보인다.   

  

  먼저, 조선의 전통 혼례가 진행되는 절차를 간략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신랑 집과 신부집 사이에서 중매잡이를 통해 혼담을 주고받는 것을 ‘의혼’이라 하는데, 의혼의 핵심은 신랑집에서 신부집에 청혼을 넣는 것이다. 신부집에서 허혼이 떨어지면 신랑의 성명과 사주를 적어 보내면서 혼일을 잡아 달라고 청한다. 이것을 ‘납채’라고 한다. 신부집에서는 택일하여 신랑집으로 보낸다. 이를 ‘연길’이라 한다. 혼인 날짜가 잡혔으니 신랑 집에서는 혼수 옷감을 신부집으로 보내어 ‘납폐’의 예를 갖추어야 한다. 다음은 혼인일을 맞아 ‘초례’를 치른다. 초례는 다음 네 단계로 나뉜다. 혼인일에 신랑 일행이 신부 집으로 ‘초행’한 후, 먼저 신랑이 신부 집에 기러기를 바치는 ‘전안례’를 올린다. 그런 다음 초례상 앞에서 신랑과 신부가 맞절을 한 다음, 신랑과 신부가 서로 술잔을 나누는 ‘합근례’을 올린다. 초례가 모두 끝나고 나면 신랑과 신부는 신방에 들어 합궁례를 치른다. 일정한 기간이 지나 신랑이 신부를 가마에 태워 신랑 집으로 간다. 이것을 ‘우귀’라고 한다. 다음은 ‘현구고례’라 하여, 신부가 시부모와 시댁 어른들에게 인사를 올린다. 이를 일명 ‘폐백’이라 한다.  

   

  그런데, 이 절차들 가운데 ‘신방’ 즉 합궁례 이후가 문제이다. 고조선부터 내려온 전통 혼례에 따르면 사위가 일정 기간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처가에 머물렀다. 아이가 한둘 태어나 자랄 때(해묵이)까지 처가살이는 계속되고, 아이 관점에서는 외갓집 생활이 몸에 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가를 특별히 좋아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김유정의 단편소설 ‘봄봄’에서도 전통 혼례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장인 봉필이가 어리숙한 나를 점순이라는 입값(미끼)으로 옭아맬 수 있었던 것도 바로 풍습 덕분이지 않은가?      


  이렇게 길었던 처가살이 기간은 주자가례의 영향으로 흔들리기 시작했고, 3년 이상이던 처가살이는 점점 짧아져 3일밖에 되지 않는 ‘반친영’혼으로 축소되다가, 요즈음에 와서는 신혼 여행을 다녀온 후 처가에 먼저 들르는 것이 예절에 맞는 것으로 화석화 되었다. 중국의 혼례는 주자가례에 근거한다. 조선의 혼례와 다른 점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신랑집에서 혼인 날짜를 잡는 것이고, 둘째는 혼례를 신랑집에서 올리는 것이며, 셋째는 ‘신방’을 신랑집 대청마루에 차려놓고 합궁례를 치른다는 것이다. 조선의 혼례에 견주면 다분히 신랑집으로 많은 권한이 옮겨 갔음을 알 수 있다. 유교는 남성의 속성을 바깥과 움직임에 비유하여 혼례의 절차 또한 신랑집에서 주도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한편 요즈음 젊은이들은 대개 서양식 혼례를 치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주례가 한창이던 유행도 이제는 변모하여 주례 없는 결혼식이 비일비재하다. 신랑 신부가 마음껏 혼례식을 기획하고 즐겁고 흥겹게 꾸미고 진행하면서 자신들의 혼인을 축복한다. 하지만 전통 혼례가 곰팡내 나는 오랜 유물인 양 취급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크다. 현대 사회는 사람 자체보다 사람을 편리하게 도와주는 물자들을 더 귀하게 여기는 것 같은 분위기로 바뀌어 있다. 돈을 많이 벌고, 좋은 차와 집을 가지고, 땀 흘리지 않고 편하게 사는 삶을 꿈 꾸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사회일수록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모른다. 전통 혼례와 서양 혼례의 본질을 들여보면서 우리 혼례가 얼마나 사람을 귀하게 여긴 예식인지 드러내 보이고 싶다.


 혼례에는 신부가 들어오는 순서가 있다. 전통 혼례에서는 어린 소녀 혹은 처녀가 신부 양옆에 서서 신부를 지키는 듯 걸음을 돕는 듯하며 들어온다. 이들을 ‘항아’라 부른다. 항아는 본래 달나라의 선녀로 옥황상제를 모시던 천상 궁녀다. 이날 하루는 이 신부가 가장 귀하고 깨끗해야 하기에 옥황상제가 특별히 신부를 잘 지키고 모시라고 보내주는 선녀들이라는 속뜻을 지닌다. 실제 현실 속에서도 이 역할을 맡는 여자아이는 마을 촌로가 몸과 마음이 정갈한 어린 소녀를 골라 뽑았다고 한다. 서양 혼례에서도 항아와 같은 구실을 하는 ‘들러리’가 있긴 하지만, 항아에 비하면 그 신성함은 훨씬 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전통 신부가 두 명의 항아와 함께 입장한다면, 서양 신부는 친정아버지 손을 잡고 등장한다. 친정아버지는 신부의 손을 잡고 오가다가 기다리고 있는 신랑에 건네주고는 제자리로 돌아간다. 마치 물건을 주고받는 느낌마저 드는 장면이다. 여자는 딸이던 시절에는 아버지가 보호해야 하는 사람이고 성인이 되어 아내가 되면 남편이 보호해야 하는 사람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 여자의 인격적 독립성이 인정되지 않는 의미로 읽히는 것은 나의 억측일까? 이런 혼인풍습은 아마도 유목문화에서 생겨서 오랫동안 이어진 것 같다. 유목문화의 가정생활은 목초지를 따라 계절마다 이동하며 이동식 주택에서 이루어졌다. 고정식 주택에 비하면 헐겁고 부실할 수밖에 없으므로 남자들은 밤새 낯선 사람들과 도둑들로부터 재산과 가축, 여자들을 지켜야 했다고 한다. 친정아버지와 신랑 사이에서 신부 주고받기란 참으로 마땅찮은 풍경이다.


 다음은 혼례 당일 신랑과 신부가 얼마나 존중받는가 하는 것이다. 전통 혼례를 치르는 신랑과 신부는 혼인 당일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에게 절을 하지 않는다. 그것이 법이다. 절하는 대상은 오로지 북위구성(사람의 목숨을 관장한다는 아홉 개의 별로 북두칠성과 자미이성을 가리킴)과 자신의 짝이 되는 배우자일 뿐이다. 주례 서는 사람이 없으니 주례에게 절할 일도 없고, 하객에게도 절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신랑 신부를 축복하러 온 사람들이지 절 받으러 온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혼인날에는 신랑 신부의 부모에게조차 절하는 법이 아니다. 그날은 그들이 사람 중에 가장 존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랑은 사모관대를 하여 가장 높은 벼슬아치의 옷차림을 하는 것이요, 신부는 구중궁궐에 사는 왕녀의 옷차림(어떤 학자는 신부의 옷차림을 하늘나라 선녀의 복장을 상징한다고 주장하기도 함)을 하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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