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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민 Mar 21. 2021

동유럽에서 문득 낯선 나를 만나다

- 동유럽 여행기 1 <사로잡힌 생각들>

- 혼자 떠나는 이의 설렘은 외딴 낯섦 속에서 오래도록 쿵쾅거렸다.


혼자 떠나는 여행은 늘 설렌다. 혼자 떠난다는 것은 외로움을 잔뜩 싸서 떠나는 거지만, 그러한 외로움 가득한 짐들 속 어디에는 낯선 흥분과 불안한 기대감이 숨어있기 마련이다. 애초 아내가 등을 떠밀듯이 한 번 다녀오라고 선심 쓰듯이 말할 때까지도 나는 늘 그렇게 살아왔듯이 조금은 좀생이처럼 내가 해야 할 일들과 내가 하고 싶은 일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잠시라도 매정하게 돌아서야만 손을 놓을 수 있는 것이 우리네 살림살이가 아니던가? 머뭇거리는 내 등 뒤에서 아내는 다시금 못을 박듯이 학습연구년을 들먹이며 시간이 아깝지 않느냐기에 그건 도시 그렇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그래 한 번 다녀오자 하는 다짐이 불쑥 생기는 것이었다. 낯선 것이 두려워져 가는 쉰 살 문지방 앞에서 나름 귀차니즘(?)의 올가미를 풀고 현관 밖을 나서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다만 한 가지 괜찮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나 근사한 삶을 꾸리는 사람들을 만나지나 않을까 하는 기대라든지, 나의 무디어진 감성을 일깨워 줄 만한 어마어마하게 감동적인 풍광이나 문물이 어디선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욕망 같은 것은 꿈도 꾸지는 않았다. 다만 조용히 혼자 좀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나의 일상으로부터 잠시 정을 거둬들이고 떠나 있다는 것! 그것도 아주 낯선 시간 낯선 장소에서 나의

일상을 멀리 건너다볼 수 있다는 것이 가슴 설레며 매력적으로 다가온 것이다.


잠이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네 시간을 훌쩍 넘어 나는 진주에서 인천으로 순간 이동해 왔다. 내가 탈 항공기는 아시아나 ‘OZ541’이었다. 항공기에 올라탈 때마다 긴장감에 사로잡힌다. 눈 깜짝할 사이 느닷없이 죽음과 맞닥뜨릴 수 있다는 긴장감은 묘한 아슬아슬함과 함께 흥분을 자아내기도 하니까 아마도 이런 느낌은 결코 촌스러운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탄 항공기가 만 미터 상공에서 시속 팔구백 킬로미터로 아찔하게 열한 시간을 날아가는 동안 나는 이냥 텅 빈 공중에서 숨 쉬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불고기 영양쌈밥’과 ‘삶은 감자치킨’을 한 점도 남김없이 싹싹 쓸어 먹고도 또 ‘카르푸’를 간식으로 먹어치웠으며, 화장실을 다섯 번 다녀오고, 영화를 세 편 보고, 물을 넉 잔 마시었다. 떠나오기 전 이를 하나 뽑았고 잇몸 수술을 하고 난 터라, 무언가를 먹고 난 다음에는 꼬박꼬박 양치를 하고 약을 먹어야 했으며, 졸음에 시달리는 동안 얼마간인지는 정확히는 모르나 꽤 오랫동안 기내의 건조함에 입술을 바짝 태워야 했다.


  저녁 다섯 시 무렵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하여 전화기를 켜니, 신기하게도 독일 시각과 한국 시각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전화기 시계를 보고, 손목시계의 시각을 일곱 시간 늦추어 맞추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지나치게 편리한 것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이후 국경을 넘을 때마다 나라의 이름과 현지에서의 통화 및 문자 요금 안내 문자가 날아올 때마다 반복되었다. 우리를 태워갈 버스는 가죽시트가 땡글땡글한 독일산 벤츠버스였고, 기사는 슬로바키아 사람이었다. 이름은 시박, 헐, 사람들이 하나같이 깜짝 놀라 응, 뭐지? 하며 길라잡이의 소갯말에 주목했다. 전형적인 동유럽형 얼굴에 임산부 같은 배가 태산이었다.


  드디어 독일산 멋쟁이 버스는 우리가 묵을 숙소 앞에 섰다. 밤 아홉 시 무렵이었고, 뮌헨의 서쪽 근교라는 점이 호텔 이름에서 잘 드러났다. ‘베스트웨스턴 호텔’은 ㅁ(미음) 자 모양을 하고 기와를 지붕에 이고 있었다. 창문이 지붕에 나 있는 것이 우리나라 다락방 같아 아늑하고 마음에 들었다. 침대에 누워 생각해 보니, 스물네 사람 가운데 남자 셋, 그 가운데 둘은 부자지간이니, 남자는 나 혼인 셈이었다. 요새는 어디를 가든 온통 여자들 천지다. 석기시대의 여인네들이 저마다의 손에 돌도끼를 들고 워워 소리치며 쳐들어오고 있는 느낌이었다. 여인천하에서 며칠을 살다가 가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해서 런지 시차 때문인지 잠이 통 오질 않았다. 후!

2014년 919() 맑았다.

[진주(03:20)-인천(07:30~12:30)-프랑크푸르트(17:00~17:30)-뮌헨(21:00~02:00)]

* 식사 : 기내식(불고기영양쌈밥, 삶은 감자치킨, 카르푸), 숙소 : 독일 뮌헨(베스트웨스턴 호텔)


* 참좋은여행사 ‘2014년 이달(10월)의 베스트 여행후기’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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