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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야기꽃

앞집 엄마

by 달마루아람


앞집 담장 가에는 키 큰 자귀나무가 있었다. 여름이면 분홍빛 꽃잎이 수줍게 피어나 담장 밖으로 몸을 내밀었고, 나는 그 나무 아래에서 놀다가 꽃잎을 모아 바구니에 담곤 했다. 그 꽃잎은 마치 앞집 엄마의 손바닥 같아서, 볼에 문지르면 시원하고 달콤한 향이 났다.

나는 앞집 엄마가 참 좋았다. 우리 엄마도 좋지만, 앞집 엄마는 나를 볼 때마다 볼을 비비며 "우리 강아지"라고 불러 주셨다. 달콤한 옥수수 수염차를 따라 주시고, 무릎에 눕혀 이마를 쓰다듬어 주는 손길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따뜻했다. 가끔 내 머리를 쓰다듬다가 멀리 하늘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쉬던 그 모습을, 나는 어린 마음에 잘 알지 못했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내가 앞집 엄마 아들이 세상을 떠난 날, 우리 엄마 뱃속에 들어갔다고 수군댔다.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냥 그 형아는 하늘나라에 있고, 나는 여기서 엄마들이랑 함께 있다고만 생각했다.

엄마는 한 번은 태몽 이야기를 해 주셨다. 논둑에 커다란 물수리가 앉아 있는데, 엄마가 잡으려 하자 앞집 엄마가 먼저 안고 가버렸단다. 그런데도 엄마는 서운하기는커녕 ‘그건 내 물수리’라는 묘한 확신이 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얻은 게 바로 나였다.


나는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내 마음속에서는 우리 엄마는 나이 많은 큰 엄마, 앞집 엄마는 젊은 작은 엄마라고 나눠 놓았다. 나는 두 엄마 사이를 오가며, 어디가 내 집인지도 잘 모른 채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밤새 이불에 오줌을 싸 버렸다. 아침에 엄마는 내 머리에 챙이를 씌우고, 호롱 박아지를 들려 앞집 엄마에게 소금을 얻어오라고 시켰다. 나는 아무 의심 없이 앞집 대문을 열고 "소금 좀 주세요"라고 했다.


앞집 엄마는 내 얼굴을 한참 바라보더니, 느닷없이 밥주걱을 들어 내 뺨을 쳤다. 그 순간, 내 안에서 앞집 엄마가 만들어둔 작은 집이 와르르 무너졌다. 따뜻한 그늘 같던 웃음소리가, 갑자기 벼락처럼 쏟아졌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마음 한구석이 세차게 찢어지는 것 같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놀라고 무서워서 그 자리에서 다시 오줌을 싸 버렸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기절하듯 잠들었다.


그날 이후, 나는 다시는 앞집 대문을 넘지 않았다. 대문 틈으로 보이는 앞집 엄마의 그림자가 나를 부르는 듯했지만, 나는 몸을 돌려 달려갔다.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우리 엄마'와 '앞집 엄마'가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사랑이라 믿었던 손길이 한순간에 벼락처럼 변할 수 있다는 걸, 그날 처음 배웠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 생각하면, 그 밥주걱 한 방에는 앞집 엄마의 서운함과 헛헛함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내게 죽은 아들을 겹쳐 보며 내내 달래고 보듬던 그 마음은, 어쩌면 내 뺨보다 더 아팠을 것이다. 내가 문을 닫고 돌아선 뒤, 앞집 엄마는 마루 끝에 앉아 얼마나 울었을까. 그 후로 나를 기다리며 대문 틈을 바라보던 그 시선이, 이제야 내 가슴속에서 자꾸만 떠오른다.


나는 그 따뜻한 손길이 가끔 그립다. 무릎 베고 눕던 마루의 나무 냄새, 내 볼을 스치던 옥수수 수염차의 향기, 자귀나무 아래 모아두었던 꽃잎까지 문득문득 그리워진다. 그 무렵 담장 위에 곱게 피어 있던 자귀나무 꽃잎은, 지금 생각하면 마치 앞집 엄마의 웃음 같았다. 그런데 그 후 어느 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 뒤, 그 꽃잎들은 땅바닥에 젖어 늘어붙어 있었다. 발에 밟히고, 바람에 흩어지고, 아무도 주워 담지 않는 그 모습이 내 마음과 꼭 닮아 있었다.


가끔 논둑길을 걸을 때면, 엄마의 꿈에 나왔다는 물수리를 떠올린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결국 내 품을 벗어나 훌쩍 날아가 버린 그 물수리처럼, 앞집 엄마의 손길도 결국 내 것이 아니었다는 걸, 그때 처음 배웠다. 그렇게 나는 네 살 때, 사랑의 얼굴에는 슬픔과 벽이 있다는 걸, 그리고 이웃의 품이 사라진 자리의 고독함을 너무 일찍 배워버렸다. 그 빈자리만큼, 앞집 엄마가 여전히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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