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가을의 한 달은 내게 유난히 길었다.
아니, 어쩌면 아직도 끝나지 않은 계절일지도 모른다. 나는 열네 살, 갯바람에 살결이 벗겨지며 자라난 아이였다. 늘 혼자였고, 친구 하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나를 가끔 보고도 “바람을 닮은 아이”라며 고개를 저었지만, 깊은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어설픈 몇 번의 동정으로 부룩소 같은 아버지와 얽히기는 싫어서였을 것이었다.
나는 갯바위 위에 빈 병을 세우고, 서른 걸음쯤 물러나 돌을 던졌다. 날아간 돌에 맞아 병이 부서질 때마다, 막힌 숨 같은 것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그것은 내가 세상과 나를 가르는 투명한 의식의 선이었다.
어릴 적, 엄마는 아버지의 거친 손길을 견디다 못해 집을 떠났다. 남겨진 집은 물 빠진 수조처럼 공허했고, 밤마다 벽을 타고 스며든 술 냄새와 아버지의 비명 같은 숨소리가 천장을 울렸다. 마을 사람들은 우리 집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한밤의 파도 소리와 겹쳐 들으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 구멍을 돌을 던지는 놀이로 메워보려 했지만, 구멍은 날로 더 커지고 깊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도회지에서 어린 새순같이 생긴 여선생님 하나가 부임해 왔다. 원래 있던 미술 선생님은 병가를 내고 자취를 감췄고, 사람들은 그 사연을 소곤거리기만 했다.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그녀는 한 달짜리 기간제 교사로 이 섬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두고, 꽃다운 나이에 얼굴까지 예쁘다고 동백 아가씨라 불렀지만, 아무도 그녀의 속을 알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하얀 안개가 사람의 몸을 빌려 내려온 듯한 사람이었다. 목련의 살결 같은 얼굴과, 달빛이 잠든 듯한 목선, 겨울 서리를 머금은 긴 머리칼까지 모든 것이 바람에 스치는 그림자 같았다. 나는 처음엔 그저 그녀의 아름다움에만 홀린 듯 보였지만, 나 자신은 알고 있었다. 내 시선 속에는 사라진 엄마의 부드러운 그림자를 찾으려는 헛된 기대가 있었다.
어느 날, 그녀는 내게 종이를 내밀며 말했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그려 보렴.”
나는 종이에 금이 간 갯바위, 검푸른 바다, 닿지 못한 파도를 그렸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그 순간, 그녀의 손끝이 떨렸고, 시선은 창 너머 먼바다를 향했다. 그녀의 눈에는 나와 닮은 깊고 검은 구멍이 숨어 있었다. 바다 쪽에 던져진 시선을 거두며, 그녀는 내 그림을 다시 내려다보고는, 조용히 옆에 앉아 말했다.
“가만 보니, 너도 친구 사귀는 법을 모르는구나.”
그 한마디는 내 안에 돌을 던진 듯 파문을 일으켰다. 그 순간 나는 그녀에게서 엄마의 몸 냄새를 맡았다. 머리를 한없이 쓰다듬던 따뜻한 손길이 잃어버린 숨결처럼 그리웠다.
나는 그녀에게 집착에 가까운 동경을 느꼈다. 학교가 끝나면 그녀 몰래 뒤꽁무니를 따라갔다. 바닷가 모래 위에 무언가를 적고, 파도에 지워지면 다시 적는 그녀의 모습. 마을 사람들은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며 수군댔다. 누구도 그녀가 쓴 글자가 무엇이었는지, 내 걸음이 무엇을 향해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나는 마을에 떠도는 소문처럼 여자를 원한 것이 아니라, 사라진 품과 잃어버린 숨결을 찾고 있었다.
늦은 오후, 복도를 지나던 내 귀에 문틈을 뚫고 나오는 낮은 울음소리가 스쳤다. 나는 창문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는 상담 선생님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작은 새처럼 어깨를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은 한순간 절벽에서 미끄러지는 것처럼 내 숨을 멎게 했다. 그때 상담 선생님이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홱 돌렸다.
“거기 누구야!”
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려 달아났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허겁지겁 달리는 동안,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처럼 거친 숨결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날 저녁에도 나는 병을 세우고 돌을 던졌지만, 손목은 물에 젖은 새 날개처럼 약해져 돌은 병을 맞히지 못하고 모래 위에 구를 뿐이었다.
며칠 뒤, 상담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그날 달아나는 내 뒷모습을 봤다고 했다. 선생님은 내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고,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집 형편을 아는 상담 선생님은 내 마음을 조금은 헤아리고 있는 듯했다.
“그날… 들개처럼 달려든 군인들이 시민들을 물어 죽이던 날, 저 여린 사람의 사랑도 부서졌어. 이리저리 도망 다니다가 그 사람의 손을 놓친 거지. 그 순간의 비통함이… 여태 남아 있는 거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그날 본 그녀의 흰 어깨, 떨리던 손, 파도보다 더 하얗게 부서지던 울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 순간, 내 허기와 그녀의 상실감이 하나의 바람으로 이어졌다. 내 안에 엄마가 남긴 구멍과, 그녀 안에 남은 그림자가 동시에 나를 휘감았다.
어느 날 그녀는 바람이 잦아지듯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다.
목련 꽃잎 같은 모습으로 온 지 한 달이 다 된 날이었다. 어느 한 사람에게도 간다는 인사 한마디 없이, 그제야 막 일어나기 시작한 갈바람을 타고 조용히 떠나버렸다. 며칠 뒤, 나는 우연히 책가방 속에서 종이쪽지 하나를 발견했다.
“모두가 봄을 기다리지만, 나는 끝내 겨울에 머물러야 할 사람.”
그 문장은 칠판 가득한 그림보다, 파도보다 더 깊게 내 안에 스며들었다. 그 뒤로도 나는 여전히 갯바위 위에 병을 세우고 돌을 던졌다. 그러나 돌은 더 이상 병을 맞히지 못했고, 내 손목은 점점 약해져만 갔다. 밤이면 파도 소리에 그녀의 울음이 섞여서 들리는 듯했다.
그해 초가을 이후, 나는 한 뼘 더 자랐지만, 그 키만큼 세상을 보는 시선은 외려 낮아진 듯했다. 가슴 속에는 여전히 하얀 안개 같은 구멍이 남아 있었다. 이제야 알았다. 그녀는 단순한 선생님도, 단순한 동경의 대상도 아니었다. 그녀는 사라진 엄마의 부드러운 숨결이었고, 밤마다 베개 속에서 몰래 불러보던 이름의 그림자였다. 나는 평생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해, 엄마의 손길을 찾기 위해, 끝없이 돌을 던지고 또 던질 것이다.
그녀는 내가 더는 다가서지 못하는 한 줄의 시였고, 바람 속에 흩어진 엄마의 마지막 웃음이었다. 그녀는 그 구멍 속에서,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못한 시처럼, 아직도 내 안에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