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은희 누나를 미치도록 좋아했다.
문방구 창 너머로 보이던 누나는 마치 만화책 속에서 막 튀어나온 요정 같았다. 종종 노란 연필을 귀에 꽂고, 투명 비닐봉지에 하늘색 지우개를 가득 담아 진열대를 정리하는 모습은 내 눈에 신비롭고도 빛나는 풍경이었다. 나는 그 창을 들여다보며, 세상 모든 환한 빛이 누나에게만 쏟아져 내리고, 그 빛을 마시기만 하면 영원히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다고 믿었다. 운동회 연습이 끝난 늦은 오후, 먼지에 뒤범벅된 내게 누나가 얼음 사이다를 건네주던 그 순간, 내 가슴 어딘가가 간질간질 타들어 가는 걸 느꼈다.
그런데 그해 가을, 대장이 마을 아이들을 모아 놓고 한 가지 놀이를 제안했다. 마을 문방구를 털자는 거였다. 그 무렵 텔레비전에서는 독일군을 무찌르는 미군 드라마가 한창 인기를 끌고 있었다. 우리 또래 무리는 '전투'라는 그 드라마에 흠뻑 빠져 방과후면 바닷가 갯바위나 모래밭을 쏘다니며 놀았다. 아마도 대장은 그 드라마를 흉내 내려는 듯싶었다. 마을 골목에 조용히 앉아 있는 문방구가 말하자면 독일군 벙커 같은 셈이었다.
침투 지점이 하필 은희 문구라는 사실을 안 것은 그날 일을 시작하기 직전이었다. 그곳에 은희 누나가 있다는 걸 떠올리니 마음이 찜찜했지만, 이상하게도 한편으로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나는 누나가 포로로 잡혀 있는 상상을 했다. 우리는 그 포로를 구출하러 가는 용사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은 더욱 쿵쾅거렸다.
대장은 부하 둘을 데리고 문구점 창문을 타고 들어가기로 했고, 나와 나머지는 망을 보기로 했다. 대장은 우리 또래보다 네댓 살이나 많았기에 우리는 그의 말을 잘 따랐다. 망산 위 서쪽 하늘에 걸린 어둑한 그믐달이 실눈을 뜬 채 우리가 하는 짓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달 같지 않은 달을 올려다보며 나는 대장이 오늘 밤 누나가 혼자 가게를 지킨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서늘해졌다.
나는 입술이 바짝 말라붙었지만, 아무도 내 얼굴빛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문방구 앞 골목에 숨어 있었고, 대장이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내 심장은 토할 듯이 뛰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대장은 연필이며 지우개, 칼이며 공책 따위를 한가득 챙겨 들고 빠져나왔다. 우리는 전리품을 나눠 가진 뒤 뿔뿔이 흩어졌다. 그날 밤, 나는 베개 속에 넣어둔, 은희 누나가 준 사이다 병뚜껑을 오래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다.
하지만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며칠 뒤, 학교 교무실에 불려 간 우리는 하나씩 전리품을 반납해야 했고, 그 후 경찰 조사까지 받게 되었다. 경찰은 이상한 질문을 여러 차례 던졌다. 대장과 누나 사이에 있었던, 뭔가 기묘하고도 불편한 사건에 관해 캐묻듯 물었다. 처음엔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질문이 거듭될수록 머릿속에 얼룩진 그림 하나가 퍼져나갔다. 그 무렵 나는 한창 사춘기의 문지방을 넘고 있었기에, 그 그림이 결국 어떤 진실을 향하는지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나는 몰랐다. 정말 몰랐다. 문방구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장이 누나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그저 바깥에서 숨죽이며 망만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내게 던져진 많은 질문과 또래들이 흘린 단서들을 이어 붙여 보니, 그 진상은 나를 한순간에 낭떠러지로 밀어버릴 만큼 충격적이었다.
끝내 경찰은 내 죄를 묻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내가 그 어둠 속의 일을 나도 모르게 열심히 도왔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몸서리가 쳐졌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누나는 그 순간부터 내 마음속에서 깨끗하고 빛나는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 더럽혀진 사탕을 다시 입에 넣을 수 없듯, 누나를 떠올릴 때마다 내 안에서 무엇인가가 고개를 돌렸다.
대장은 소년원으로 잡혀갔고, 누나는 여전히 문방구를 지켰지만, 내 안에서 이미 더럽혀진 사탕처럼 버려져 있었다. 그 뒤로 누나를 떠올리면, 달콤했던 그 사이다 맛이 입안에서 썩은 물처럼 변해버렸다. 내 마음속에서 누나는 점점 흐려지고, 낯선 그림자로 뒤덮였다. 마을 어귀에서 누나를 마주쳤을 때, 나는 도망치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나는 알고 있었다. 누나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는 걸. 그럼에도 나는 너무 비겁해서, 내 안의 죄책감을 견디지 못해 모든 얼룩을 누나에게 뒤집어씌웠다. 그렇게라도 해야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누나를 잃은 것이 아니라, 내 속의 순수를 내 손으로 짓밟아 버린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내 안의 사랑이 그렇게 쉽게 바래질 수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죄책감과 상실감이 뒤엉켜, 누나는 내 어린 시절의 빛나는 여신이 아니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되어버렸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 밤이 내 마음속 무언가를 영영 훔쳐 가 버린 것 같기도 하다. 나의 첫사랑은 그렇게, 문방구의 싸구려 연필들처럼 부서진 채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나는 그 뒤로 한참 동안, 세상을 의심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