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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야기꽃

돌아온 편지

by 달마루아람

고군, 이게 얼마 만이야.

이제 가을이 오려나 보군.

새벽은 제법 가을 냄새를 풍기고 있어.

자네가 있는 그곳 바다도 머잖아 쓸쓸한 노을이 저녁마다 지는 걸 볼 수 있겠군.

노란 물감이 화선지를 타고 제멋대로 흘러가듯 저녁노을이 바다를 적셔가는 풍경을 다시 보고 싶네.


자네는 노을이라는 말을 붉새라고 했지.

자네 나이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나, 꽤 근사한 사투리였어.

처음 듣는 말이었지만 느낌이 좋은 말이라 생각했지.

더 나아가 석양이 서산을 넘을 때,

아주 짧은 그 시간 동안에도,

수십 가지 색깔로 몸부림친다는 진실에 가 닿았지.

맞아. 붉새는 노을의 다른 이름이라기보다

하루의 마지막 끝자락에서 피어나는 노을 다음의 빛 꽃인 거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부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노랑의 색감이 배는 순간을 노을, 붉은 핏빛으로 번지는 때를 붉새!


그 바다는 아직도 근사하게 아름다우신가?

북항의 밤바다는 요즈음도 여전히 잔잔하고 흔들림이 없을 테지.

세상이 몹시 더럽혀지고 있다지만 그 바다는 그대로 맑고 푸를 것 같구먼.

아침 해가 떠오를 때마다,

오늘 당신의 하루는 무언가 거룩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일으켜 주던 마법 같은 바다 말이지.

한낮이 되면 또 어땠었나?

무심히 떠 있는 누에섬 너머에는 수많은 윤슬이 빨랫줄 같은 수평선에 매달려 밤별처럼 반짝이지 않았었나!

자네 고향인 그 마을을 나는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네.


고군, 그래 자네 이름이 고군이라 하였을 때, 자네 성만 말하는 줄로 잘못 알아들었다가 얼마나 혼이 났는지 지금도 그 무안함이 기억날 정도군.

자네 아버지도 참 유쾌한 장난꾸러기 같은 분이셨던 모양이야.

하필 외자 이름을 ‘군’으로 지으시다니.

자네를 처음 만난 것은 가을이 깊어지려는 무렵이었어.

갓난아기의 손바닥 같은 단풍잎들이 발그랗게 물든 풍경들이 보이기 시작했거든.


그때 자네 나이가 열네 살이었던가.

소년답게 얼굴에는 뽀얗게 윤이 나고, 작은 입에서는 온종일 참새 소리 같은 웃음소리가 떠나지 않았지.

내도록 시원하고 맑은 아이였어. 그런 자네가 난 참 마음에 들었어.

처음 볼 때부터 그랬을 거야.

그 적에 나라는 사람은 오래전 마음을 다친 탓에 퍽이나 아파하던 때라,

온전히 삶을 꾸리기도 힘에 겨웠다네.

지나가는 바람결에도 살이 베는 듯 고통을 느끼며 지내던 시절이었지.

한 몸 같던 사람을 잃는다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지.

살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생기기도 하잖나.

그런 일이 내게도 닥쳤고, 베였고, 무너졌고, 다시는 일어나기 싫었어.


아침저녁으로 바다에 나가야 했어.

검고 푸른 자갈들이 물살에 휩쓸리는 소리를 무연히 듣고 있으면 그 사람과 함께 했던 시절이 연기처럼 피어나곤 했거든.

그럼 헤어진 뒤부터 생긴 통증이 잠시나마 가시는 듯해서,

어떤 날엔 나도 모르게 한나절 오롯이 바닷가 숲 언저리를 서성거리기도 했던 거야.


아참, 그날 밤이 떠오르는군. 보름이었지 아마.

꼭 보름밤이 아니었는지도 몰라.

어쨌든 달이 무척 크고 밝았으므로 자네는 선착장에 묶인 아무 배나 한 척을 골랐지.

능란한 솜씨로 밧줄을 풀고 미조리 만 한가운데로 노를 저어 들어가던 자네의 그리메가 말이야.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르거든.

근사했어.

아주 근사했어.

내가 달빛을 마주한 탓에 자네의 낯꽃을 살필 수는 없었으나, 자네의 몸 전체가 그려내는 그림자는 음영 처리된 그림자극의 주인공 같았지.

단 하루도 마음이 잔잔한 적이 없었던 나의 청춘은, 온종일 바람이 부는 바다인 양 울렁거렸다네.

사랑하는 사람을 느닷없이 빼앗기듯 잃고, 혼자 남아 숨을 쉬며 어딘가로 가야 한다는 인생길이 너무 힘겨웠어.


사실은 끊고 싶어서 찾았던 바다가 미조리 바다야.

너무 고통스러웠거든.

광주 근방에도 바다는 많았지만,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낯선 곳에 나를 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으로 어디로 가는 버스인지도 확인하지 않고 출발해 버렸지. 내릴 때가 되어서야 표를 끊지 않았음을 알았어.

정작 당황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운전기사였지. 어떻게 개찰에서 빠졌는지 모르겠다며 한참을 자학하던 모습이라니.


고군, 그 아이 기억하나?

짬이 날 때마다 바닷가 모래밭에서 돌멩이를 던지던 친구 말이야.

엄마는 찾았을지 궁금하구먼.

그 친구 소식을 알거든 기별 좀 주게나.

나를 자기 엄마처럼 따랐던 낙엽 같은 아이였어.

왠지 까닭은 알 수 없으나 그 아이를 떠올릴 때마다,

늦가을의 낙엽이 길바닥에서 바람에 나뒹구는 풍경이 함께 떠올랐거든.

그 아이는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가슴 한 모서리에 앙금처럼 쌓여 있었던 모양이야.

이상하게 기억이 너무 생생해. 부탁하네.

벌써 10년이 지나지 않았나?

자네도 이제 스물네 살이 무르익어가는구먼.


고군, 이 편지는 사실 자네에게 닿지 않을지도 몰라.

주소를 쓰는 순간에도 알고 있었지.

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건,

이미 그때의 바다도, 그때의 우리도

다른 색상과 다른 모양과 질감으로 바뀌었다는 뜻이니까.

그럼에도 나는 이 편지를 써서 붙였네.

우체통에 넣는 순간,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더군.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마치 내 안의 한 시절을

다시 세상으로 내보내는 기분이었어.


사람이란 참 이상하지 않은가.

잃어버린 것일수록, 돌려보내야 비로소

그리움이 모양을 갖추는 법이지.

나는 이 편지를 다시 돌려보내며

내 안에 남은 젊은 날의 상처를

조용히 접어두려 해.

만약 이 편지가 혹시라도 자네 손에 닿는다면,

그저 웃어주게나.

우리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고,

그 속에서 나는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로

이 편지를 쓴 것이라고.


오늘 새벽에도 바람이 불고,

멀리서 파도 소리가 들려.

그 바다는 여전히 자네가 말하던 그 붉새의 번짐으로

저녁마다 불타고 있겠지.

나는 그 빛의 끝자락을 따라

한참을 서 있다가 돌아오곤 한다네.

돌려보낸 건 편지 한 통뿐이지만,

그 안에는 내 지난 생의 절반이 들어 있어.


그럼 이만.

가을이 완연히 오기 전에,

자네가 있던 바다를 한 번 찾아가 봐야겠구먼.

그 바람결에 이 편지의 한 조각이라도

닿을 수 있다면 좋겠어.


안녕, 고군.

내 가장 젊었던 아픔이여.


35살 돌아온 편지3.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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