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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야기꽃

그녀는 오지 않았다

by 달마루아람

1979년 늦가을, 바닷바람이 뺨을 베고 지나는 바닷가 마을. 바다 끝에 붙어 있는 작은 중학교는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담장 안 허름한 운동장을 지나면, 조그마한 음악실이 한쪽 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음악실 창문은 늘 바람에 흔들려, 마치 안쪽에서 피아노 음률이 한꺼번에 쏟아질 듯 떨리고 있었다.


나는 중학교 1학년, 이제 막 이성이라는 기묘한 감각에 눈을 뜬 소년이었다. 어머니가 없는 나는 혼자 상상에 잠기는 일이 많았다. 머릿속에선 음악 선생님이 늘 중심이었다. 그녀는 도시에서 온 젊고 세련된 여인이었다. 매일 달라지는 옷차림과 꽃향기, 도시 여자의 매무새는 내게 아득한 신화처럼 다가왔다.


그녀가 피아노 건반을 누를 때면, 가느다란 손가락이 바다 위를 스치는 하얀 갈매기 같았다. 낮은음은 마을의 만을 파고들며 일렁이는 푸른 물결 같았고, 높은음은 언덕 위로 튀어 오르는 햇빛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목소리는 파도를 타고 등대까지 번져갔고, 내 귓가에서 무한히 되돌아왔다. ‘오 솔레미오’를 부를 때마다, 나는 그것이 나만을 위한 노래라고 굳게 믿었다.


나는 음악실 유리창을 닦으며 그녀의 시선을 기다렸다. 유리창에 반사된 내 모습은 어설펐지만, 그마저도 그녀가 봐주기를 바랐다. 친구들이 그녀와 장난을 치고 웃을 때면, 내 안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열기와 서늘한 바람이 동시에 피어올랐다. 다른 남자 교사와 나란히 걷는 모습만 봐도 숨이 막혔다.


그녀는 내 모든 호의를 스스럼없이 받아주었다. 화단의 나뭇가지를 치워주고, 피아노 교재를 옮겨주고, 먼 길을 마중 나가는 일조차도, 나는 기꺼이 감당했다. 나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었고, 그녀 역시 나를 특별히 대한다고 여겼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그녀는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내일 비가 많이 온대. 버스가 이곳 종점까지 못 올 텐데. 네가 마중 좀 나와 주겠니?”

나는 심장이 귀까지 차오르는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내 방 안은 온통 '오 솔레미오'의 가락으로 가득 찼다. 그녀가 무슨 코트를 입고 올지, 어떤 향기가 피어날지, 내가 짐을 들며 그녀 손에 살짝 닿는 순간의 떨림까지, 하나하나 머릿속에서 수백 번을 그려보았다.


다음 날, 하늘은 잿빛으로 무거웠고 바다는 괴성을 지르듯 소리쳤다. 폭우는 길을 진흙탕으로 만들었고, 바람은 마을 지붕을 뒤집어 놓을 듯 세찼다. 그러나 나는 길을 나섰다. 십 리가 넘는 진창길을 걷는 동안, 내 머릿속은 오직 그녀의 얼굴로 가득 찼다.


버스를 기다리며 한참을 서 있었다. 나는 가로등 불빛이 바다 위에 쏟아진 채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봤다. 그 불빛은 마치 내 가슴속 파도처럼 떨렸다. 순간, 그녀가 오지 않거나 훨씬 이른 시각에 이미 와 있거나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그 상상을 떨쳐냈다. 이미 두 번의 버스를 받았으니, 기다림은 세 시간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 흙탕길을 어찌 혼자 짐을 들고 걷게 할 것인가. 오늘은 내가 그녀를 구하는 날이라고, 나 자신을 수없이 다독였다.


마침내 막차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 문이 열리고, 내 심장은 갈라진 파도처럼 요동쳤다. 손님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내 눈에 들어왔지만, 그녀의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문이 닫히고 버스가 돌아 나가는 순간, 내 심장이 텅 비어 버리는 것 같았다.


돌아오는 길은 한층 더 어두워져 있었다. 빗물에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 진흙이 온몸에 묻었지만, 그보다 더 깊이 더럽혀진 것은 내 마음이었다. 사랑이라 믿었던 어리석은 감정은 한순간에 흘러내렸고, 내 발자국 뒤로 쏟아지는 파도 소리가 나를 비웃는 듯하였다.


집에 돌아와 등대 불빛을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절벽 언덕 위 사택 창문 어딘가에 혹시 그녀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까, 몇 번이나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창문은 아무 말 없이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바다는 계속 제 멋대로 몸을 흔들며, 나를 놀리는 듯 검은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사랑이라 믿었던 모든 것은 나 혼자 짓고, 나 혼자 믿고, 나 혼자 부풀린 성(城)이었다는 것을. 음악실에서 반짝이던 그녀의 손가락과 바람결에 흔들리던 머리카락, 그 모든 순간은 내 안에서만 울리는 허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렇게, 내 첫사랑의 오솔길은 가을장마 끝자락에서 절벽처럼 끝나버렸다.


그녀는 끝내 오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올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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