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배길에서 예제의 대전까지 -
류의양(柳義養, 1718~? )은 조선 후기의 격동기 한가운데서, 한편으로는 유배지의 변두리를 떠돌며 한글 기행문을 남긴 문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조 대 국가 전례를 정비한 실무 관료였다. 그의 삶은 벼슬길과 유배길이 번갈아 교차하는 가운데, 문장과 기록, 그리고 제도 정비라는 세 축이 서로 맞물려 돌아간 독특한 궤적이었다.
1718년 숙종 말기의 전주 유씨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이미 조부 유태명이 승지를 지낸 바 있는 명문가 출신이었다. 자(字)는 계방·자장, 호는 후송이라 했으니, 일찌감치 학문과 관료 세계를 향한 길이 예고된 셈이다. 18세기 초는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던 시기였고, 류의양은 노론계 석학 이재(李縡)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문장을 익히며 자연스럽게 그 학맥 안으로 편입되었다. 구체적인 어린 시절의 모습은 전하지 않지만, 그가 평생 보여 준 치밀한 기록 정신과 고른 문장력은 이 시기 축적된 학문적 기반의 산물로 보인다.
1756년, 영조 치세가 안정 국면으로 접어들 즈음 그는 생원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었고, 곧 현감으로 나아가 지방 행정을 맡았다. 1763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면서 본격적인 중앙 관료의 길이 열렸다. 정언·사서·수찬·교리 등 사간원과 홍문관의 관직을 두루 거치며 조정의 언로를 관리하고 왕명의 문서를 다듬는 역할을 맡았고, 이 시기부터 그의 이름은 문장가이자 언관으로 조정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언로를 담당하는 자리는 곧잘 정치 갈등의 최전선이기도 했다. 전환점은 1771년이었다. 영조 후반, 붕당 간 갈등이 누적된 가운데 류의양은 홍문관 수찬·부수찬을 지내던 중 삭탈관직·서인이라는 중벌을 받고 남해로 유배된다. 음력 2월 17일 유배 명을 받고, 26일 노량나루를 건너 남해에 이르러 약 다섯 달 동안 머물렀다.
이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는 한 지방 관료 출신 유배인을 넘어 예리한 민속 관찰자로 변모한다. 남해의 바다와 섬, 해녀와 어민의 삶, 혼례와 장례, 방언과 풍속, 군사 지리까지를 한글 산문으로 정리한 『남해문견록』은 유배의 상처 위에 세워 올린 새로운 글쓰기의 장이었다. 유배가 한 개인의 몰락이 아니라, 조선 사회의 주변부를 비추는 관찰의 계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라 할 만하다.
남해에서 풀려난 뒤에도 그의 삶은 곧바로 안정을 찾지 못했다. 충청도 아산으로 다시 유배되며 정치적 감시는 계속되었다. 이어 1773년에는 조정으로부터 종성 유배를 명받고, 함경북도의 북청·단천·경성·회령 등 북관 일대를 지나 종성에 이르렀다가 석 달 남짓 머문 뒤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이 왕복 여정은 『북관노정록』이라는 또 하나의 국문 기행 수필로 결실을 맺는다. 그는 길 위에서 만난 지명과 설화, 풍속과 방언, 사화(史話)와 민담을 모아 살아 있는 북방문화의 지도를 그려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