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배길에서 예제의 대전까지 -
이 두 편의 유배 기행문은, 남쪽 바다와 북쪽 국경이라는 서로 다른 변두리를 통해 조선의 공간과 사람을 입체적으로 기록한 쌍생아 같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유배가 끝난 뒤 류의양은 조정으로 다시 돌아왔다. 1775년, 사간원 집의로 복귀한 그는 대신들의 안일함을 탄핵하며 예전의 언관 기개를 되찾았다. 영남어사로 나아가 지방의 폐단을 조사한 기록에서 보이듯, 유배의 체험은 그에게 민생에 대한 감수성을 한층 더해 주었다.
1776년에는 왕세손(훗날 정조)의 응제에서 1등을 차지해 문장력을 다시금 인정받고, 통정대부에 오르며 정치적 위상도 회복한다. 강릉 부사로 부임한 뒤에는 조세·공물 제도의 모순을 조목조목 아뢰고, 진전 면세나 표류 왜인 처리 문제 등 구조적 폐단을 정조에게 보고하였다. 그가 남해와 북관에서 민초의 삶을 눈여겨봤던 시선이 이제는 지방 행정의 개혁론으로 이어진 셈이다.
그러나 류의양의 이름을 조선 후기 정치사와 학술사에 굵게 남긴 것은 역시 정조 대 예제(禮制) 정비 사업에서의 역할이었다. 1778년 이후 대사간·승지·예조참의·공조참판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그는 예조와 시강원, 춘방 등 핵심 기관의 연혁·제도·의례를 정리하는 일을 맡는다. 『춘관지』와 『영희전지』를 통해 예조와 왕실 제사의 체계를 정비하고, 『시강원지』와 『춘방지』를 통해 세자 교육과 관련 관서의 조직과 의식을 정리하였다. 이는 정조가 표방한 예치(禮治)의 이념을 실제 제도와 문서의 차원에서 뒷받침한 작업이었다.
1787년, 그는 부총관 자격으로 『국조오례의』 보완 작업에 참여하며 국가 전례의 틀을 손질하는 데 깊이 관여한다. 이어 1788년에는 『춘관통고』라는 방대한 예서 편찬을 완성한다. 96권 62책에 달하는 이 거대 필사본은 예조 소관 업무를 길례·가례·빈례·군례·흉례로 체계화하여
조선 전례의 역사와 실제 운용을 한데 모은 국가 전례 대전(大典)이었다. 한때 변방으로 밀려났던 유배인이 이제는 국가 의례의 “공식 교과서”를 만드는 실무 책임자가 된 것이다.
그의 생애 말년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일부 지역 자료에서는 1788년경 사망으로 본 기록도 있으나, 공식 사료와 학계는 대체로 사망 연도를 미상으로 처리한다. 이는 역설적으로, 국가 전례의 거대한 작업을 마친 뒤 그가 조용히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류의양의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기록’과 ‘실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불우한 유배 경험을 한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길 위에서 만난 사람과 언어, 풍속과 자연을 꼼꼼히 적어 후대 연구자들에게 소중한 민속·방언 자료를 남겼다. 또한 중앙으로 돌아와서는 예조와 시강원 등 핵심 관서의 제도와 의례를 정리하고, 국조오례와 춘관통고라는 국가 전례의 거대한 틀을 완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렇듯 류의양은 “유배 문인”과 “예제 학자”, 그리고 “실무 관료”라는 세 얼굴을 함께 지닌 인물이었다. 정치적 부침 속에서도 학문과 기록, 관료 실무를 통해 정조 대 문예·경학 중흥기의 한 축을 떠받쳤다는 점에서, 그는 조선 후기 지식인의 한 전형으로 평가될 수 있다. 변방의 길에서 길어 올린 민중의 삶과, 궁궐의 전례를 다듬는 치밀한 손길이 한 사람 안에 공존했다는 점에서, 류의양의 생애는 오늘날에도 다시 돌아보게 되는 묵직한 의미를 지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