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읽을거리는 꾸며낸 세계인 소설과 실재하는 세계인 세상, 그리고 가장 일반적인 기호인 언어, 이렇게 세 가지라는 겁니다. 그리고 읽을 이는 매우 많이 등장하지만 가장 중심에 있고 포괄적 읽기를 하고 있는 인물은 <나>라는 것이구요.
그런데 이 읽을거리는 왜냐 선생님이 했던 수업 내용과 닮은 데가 있어 잠시 인용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만사가 그래요 밑둥을 보도록 해요. 가지 끝이나 잎사귀만 보면 혼란에 빠지기 쉽죠.…’
2)'…우리가 이렇게 소설을 읽고 궁리하는 건 바로 그런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섭니다.…’
3)‘…말은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도구에요. 그게 전달하는 뜻이 결정되고 변한다는 얘깁니다.…’
1)은 세상읽기, 2)는 소설읽기, 3)은 언어읽기의 기본 태도를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세상 읽기는 학교를 배경으로 일어나는 실재 세계를 읽는 것이고, 소설 읽기는 허생전 속의 꾸며낸 세계를 읽는 것이고, 언어 읽기는 상징적 기호로 만들어낸 기호 체계를 읽는 것입니다. 삶 읽기와 글 읽기와 말 읽기라고 바꾸어 말해 볼 수 있겠네요.
그런데 이 셋은 따로 떨어진 다른 말들로 읽히지 않습니다. l)의 '밑둥'은 2)의 '진실', 3)의 '실체'와 뜻이 같은 말이며, 1)의 '만사'는 2)의 '소설', 3)의 '말'과 뜻이 같은 말입니다. 말 읽기와 글 읽기와 삶 읽기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 소설은 이 세 가지 읽기가 나란히 나아갑니다. 말을 읽는 것과 글을 읽는 것과 삶을 읽는 것은 별개의 일이 아니라, 그 원리가 하나여서겠죠 .
<나>는 허생전 읽기를 통하여 왜냐 선생님이나 윤수를 읽게 되고, 이 삶 읽기를 통하여 자신의 삶을 바르게 만드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스스로 만든 환상에서 벗어나 이경미의 실체를 읽게 되니까요. 스스로 환상을 만든다는 것은 허위와 피상에 사로잡힌다는 것인데, 글 읽기와 삶 읽기를 통하여 말을 제대로 읽어 실체를 보았다는 겁니다.
<껍데기를 뚫고 들어가 그 안에 들어 있는 알맹이를 보게 된 것입니다>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누가 무엇을 무엇이라고 읽느냐 하는 물음에서 '무엇을'과 '무엇이라고'의 관계가 합당하다는 거겠죠. 앞 보기에서 나무의 정체를 읽을 때 가지나 잎사귀가 아닌 밑둥을 보는 것, 소설을 읽을 때, 속임수나 거짓이 아닌 진실된 주제를 찾는 것, 말을 들을 때 피상이나 환상이 아닌 실체를 알아채는 것일 겁니다. 이 모두가 제대로 읽는 것입니다.
자 이제 <나>를 중심으로 '무엇을 무엇이라고' 읽었느냐를 살피고 싶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의 읽기가 어떻게 달라져 가는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읽어야 되는 근거는 <나>가 주인공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앞에서 읽을거리가 가장 많고 폭 넓은 인물인 것을 근거로 주인공을 <나>라고 보았습니다. <나>가 주인공일 수 있는 까닭은 또 있습니다. <나>가 읽기에 있어서 가장 많은 변화를 보이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허생 읽기를 볼까요? <나>는 허생을 홍길동과 비교하는 과정에서 허생이 머리로만 돕고, 선비라는 신분을 끝까지 내세우며 결국은 지고 만다는 답을 하게 되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깨달음의 답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왜냐 선생님은 칭찬하고 허생과 작가의 한계를 지적하는데, 그들의 한계란 아는 것에 그치고 말 뿐, 실천하지 못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내심 허생 전반을 긍정하고 추종하던 <나>로서는 적잖은 충격이었습니다. 홍길동과의 대조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허생의 단점을 스스로 지적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윤수를 어떻게 읽고 있을까요? 처음에 윤수는 <나>가 도와야 할, 몸 약한 친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윤수는 국어 숙제를 <나>에게 물어 올 만큼 읽기 능력도 뛰어나지 않고, 말도 자꾸 더듬습니다. 그러나 <나>가 허생의 한계를 깨달은 이후에는 말더듬이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업으러 가면서도 업히러 가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만큼 윤수를 대단하게 보게 된 것이죠 .
<나>는 왜냐 선생님을 어떻게 읽습니까? 왜냐 선생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가 좋아하고 존경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볼수록 그 정도가 깊어져 감을 알 수 있습니다. 막연한 존경에서 이유 있는 존경으로 달라져 간다 할까요? 수업 시간의 선생님에 대한 태도는 별반 달라져 보이지 않습니다. 동철이가 선생님을 비판할 때에도 대꾸할 생각을 못할 뿐 아니라 윤수가 동철을 꺾으라고 요청할 때도 마땅한 구실을 찾지 못합니다. 또 '솔직히 말해서 그런 일이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부터가 마땅찮았다'라고 할 만큼 선생님의 노조 활동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판단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수업을 받는 동안 <나>는 <나>도 모르게 선생님으로부터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홍길동과 허생을 대조하는 답변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수업의 영향으로 선생님의 노조 활동에 대한 <나>의 생각이 달라집니다. 결국 왜냐 선생님을 응원하는 윤수를 업으러 가게 됨으로써 윤수를 제대로 읽음과 동시에 왜냐 선생님을 제대로 읽게 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K에 대한 생각도 바뀌게 됩니다. 처음에는 K를 볼 때보다 생각할 때가 더 좋다든지, 이경미라는 진짜 이름보다는 K라는 가짜 이름을 지어 부르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볼 때/생각 할 때]는 [실제/관념]의 대립이기도 합니다. 보는 것은 현실적인 행동이지만 생각하는 것은 관념적인 사고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경미라는 이름은 실체를 가리키는 이름이지만 K라는 가명은 내가 만들어 놓은 환상적 어떤 인물로서의 이경미를 가리킵니다. 이 대립은 [실체/기호]의 대립이지만 앞의 실제와 관념의 대립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랬던 <나>가 끝에 가서는 K를 지우게 됩니다. <나>는 실제 이경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문학과 선생님의 노조 활동이 격이 맞지 않는 것으로 보는 K의 실체에 눈 뜨게 된 것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