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나>는 허생을 좋아하다가 허생의 한계를 알게 되었고, 윤수의 부족한 면을 안쓰러워 하다가 윤수의 위대함(실천력)에 눈을 떴고, 선생님의 노조 활동에 혼란스러워 하다가 명료한 답을 찾았으며, K의 허상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K의 실체를 보게 되었습니다. 허생 대신 홍길동을 만났고 K대신 이경미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차림새가 행려병자와 같을지라도 투사는 그 더러운 옷 속에서-눈빛을 빛낸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문제는 피상이 아니라 본질을 읽는 것에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했던 강의는 이래서 매우 뜻이 깊습니다.
<나>의 달라짐은 읽기의 달라짐인데, 그 달라진 모습은 가지나 잎사귀에서 밑둥으로, 거짓이나 허위에서 진실로, 피상이나 환상에서 실체로의 달라짐입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결국엔 껍데기를 뚫고 들어가 그 안에 들어 있는 알맹이를 보게 된 것입니다. K라는 허상을 지우고 이경미라는 실체를 발견한 후의 <나>의 삶을 보십시오.
‘…나는 온몸이 떨렸다. 그 종이에 적힌 말은 보지 않아도 읽을 수 있었다. 윤수가 땅바닥에 누워 버리는 게 보였다. 내가 업으러 가는지, 업히러 가는지 알 수 없었다. 왜냐 선생님의 '허생전' 수업은 계속되고 있었다. '
<모든 읽기는 모든 삶의 시작입니다>
이 소설은 움직임-행위 -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주인공의 느낌이나 생각 들이 많이 들어와, 여느 소설들만큼 움직임이 또렷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이 소설 전체가 '일기'라는 형식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일 겁니다. 곧 모든 움직임들이 서술자의 입이나 눈을 통하여 그대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일기라는 다소 비평적인 거름 장치를 거치고 있기 때문인 거죠. 그러니 움직임들마저 정적으로 희석되어 다가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결국 서술자를 비롯한 몇몇 인물들의 깨달음과 맥이 닿아 있습니다. 이 소설은 한편으로 보면 깨닫는 이야기로 볼 수도 있는데, 몰랐다가 어떤 사건을 겪고 난 뒤에 알게 된다는 것이지요. 서술자가 그렇고 윤수가 그렇고 심지어는 동철이까지도 그렇습니다.
결국 세상을 잘 살기 위해서는 세상을 잘 알아야 하고, 세상을 잘 알기 위해서는 세상을 잘 읽어야 합니다. 세상을 잘 읽으려면 허울이나 껍데기에 매달려서는 안 되고, 그 속 알 맹이나 진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알맹이를 깨달아야 하는 것이죠. 여러분은 삶을 살 때 세상의 알맹이를 알아볼 자신이 있습니까? 허생과 홍길동, 교감 선생님과 왜냐 선생님, 동철이와 윤수, K로 읽기와 이경미로 읽기, 깨닫기 전의 <나>와 깨달은 뒤의 <나> 가운데 뒤쪽 사람들을 선택할 만한 눈을 가졌다고 자신하세요? <끝>